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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오 기자의 증시, 어제와 오늘] 공모주 열풍의 허망한 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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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오 기자의 증시, 어제와 오늘] 공모주 열풍의 허망한 뒤끝

입력
2005.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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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증시를 뜨겁게 달구었던 공모주 청약 열풍이 휴지기에 들어간다. 이달 11~14일 공모가 예정된 금호타이어를 제외하고는 3월말까지 이렇다 할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차명계좌까지 등장하는 과열 분위기 속에 1월 한달간 무려 8조2,690억원의 자금이 몰려드는 ‘공모주 르네상스’를 지켜보며 과거 공모주 청약 열풍의 허망한 결말이 떠올랐다.

공모주 청약 열기가 처음 본격화한 것은 1976년이 아닌가 싶다. 그 해 3월 한국비료 공모에는 6만2,000여명의 투자자가 쇄도했다. 정부가 1인당 공모주 배정을 50주로 제한하자, 증권사 지점에 새벽부터 줄을 서 청약표를 받은 후 일당을 받고 전주에게 넘기는 ‘청약꾼’까지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다.

87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가 국영기업 주식을 서민에게 보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걸면서 두 번째 공모주 붐이 일어난다. 청약만 하면 2배 이상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소문에 88년 포스코 청약에는 320만명, 89년 한국전력 청약에는 543만명이 몰려들었다. 온 나라에 주식열풍이 분 것이다.

99년 코스닥시장의 광풍은 공모주 열기의 하이라이트였다. 99년 한해 동안 160개사가 코스닥시장에 신규 진입했고, 이 과정에서 10조원이 넘는 돈이 몰렸다. 코스닥 열풍은 프리 코스닥 시장으로 옮겨가 "웹사이트 하나 만들고 회사이름에 ‘닷컴’이라고만 붙이면 수십 억원이 모여든다"는 말이 우스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공모주 열풍의 뒤끝은 항상 개운치 않았다. 76년 공모주 청약경쟁에 뛰어든 투자자들은 78년 8월 ‘건설주 파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중동특수를 계기로 75년부터 매년 2배 이상 오르던 건설주들이 갑자기 곤두박질 친 것이다. 80년대 말 공모주 열풍도 ‘3저 호황’ 바람을 타고 한동안 잘 나가다 90년 10월 10일 ‘깡통계좌 강제 정리’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날 증권사7 객장에선 자살시도와 자해소동이 잇따랐다. 99년의 코스닥 열풍 역시 2000년 4월 전세계적인 정보기술(IT) 거품 붕괴와 함께 막을 내렸다.

주가가 오르고 내리는 것이야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우리 증시에서는 주가하락의 피해자가 늘 개인투자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 국가 경제적인 필요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공모주라는 당근으로 국민들을 증시로 유도했지만, 결국 그 과실은 기업이나 투기꾼들이 독점해왔던 게 사실이다. 2000년 이후 증시를 철저히 외면하던 개인투자자들이 하나 둘 증시로 돌아오고 있는 요즘, 증권업계와 정책 담당자들은 과거의 실책을 곰곰이 되%7씹어볼 필요가 있다.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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