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시인이 강화도에 들어가 산 게 햇수로 꼭 10년째다. 이런 말을 그대로 옮겨 좋을지 모르겠으나 그 사이 누구는, '그 X이 거기 가서 한 일이라고는 산문집 한 권 달랑 낸 게 전부…'라고도 했다. 그 가장된 아까움과 안타까움이 미움과 실망으로 기울 즈음, 그가 드디어 시집을 냈다.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발행)이다. 김훈씨는 그를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는 사람"이라 평했다지만, 겸연쩍%은 듯 수줍게 입초리 휘어 올리는 그의 ‘말랑말랑한’ 웃음 역시 가난과 불우 따위를 너끈히 버텨내게 한 '힘'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시집은 그의 10년 섬살이의 질량과 밀도를 전하는, 하나하나 그를 빼다 닮은 시들로 묵직하다. 그것은 '길' 위에 선 자의 쓸쓸함이고, '그림자' 말고는 응시할 것이 없는 자의 외로움이고, 외로운 자의 운명적 '연대의식'이고, 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말랑말랑한 힘’이다. 또 그것은 ‘섬’의 존재방식이자 운명이기도 하다. ‘물 울타리를 둘렀다/울타리가 가장 낮다/울타리가 모두 길이다’('길') 그의 글처럼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은 다 섬’이어서 ‘섬은 하나이면 섬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섬엔 그리움들이 가득 차 있’고 ‘모든 것의 존재 방식은 그리움의 한 표현’일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던가.
그의 고독은 ‘길’ ‘그림자’ 등 시집을 관류하는 주요 시어들과 삐뚤삐뚤 나는 나비, 구불구불 휜 가지, 폐타이어 등 시의 재료들이 주는 이미지가 그렇다는 의미다. 그것은 묵은내 나는 서정의 외로움이 아닌, 치열한 시적 사유의 터전으로 암시된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陸? 않으려는 마음 다짐…’(‘감나무’). ‘구르기 위해 태어난 타이어 급히 굽은 길가에 박혀 있다/…몸 속 탱탱히 품었던 공기 바람에 풀고/ 움직이지 않는 길의 바퀴가 되어// 움직이는 것들의 바퀴인/ 길은 달빛의 바퀴라고…’(‘폐타이어’).
‘그림자’라는 단어를 품은 시는 20여 편에 이른다. 시에서 말하는 그림자의 뉘앙스는 여러가지이지만, 대개는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죽음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타올랐다’(‘질긴 그림자’)고 할 때의 그 ‘그림자’의 의미다. 시인은 실체와 그림자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그 작던 씨앗의 그림자 땅 속으로E 들어가/ 저리 길다란 그림자를 캐내고 있다// 기억이여// 태양빛으로 빚은 그림자의 씨앗/ 머리에 촘촘히 박고 서 있는’(‘해바라기’).
시인은 "나의 지금 삶이 유년의 삶의 그림자라는 생각을 더러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육박하는 순간에 감지하는 서글픔일지 모른다. ‘…목련꽃 한 잎 떨어진다/ 그림자 한 잎 진다// 만나// 꽃이 썩으면/ 썩어 빛이 되는 꽃 그림자’(‘봄’).
비린내 진한 그 서정들이 시에서 좀처럼 발각되지 않는 것은, 사물의 힘을 연화(軟化)하고 연한 힘에서 ‘참 힘’을 발견하는 긴장된 시선이 그것들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망치의 완력으로 말뚝을 내리 박는 것이 아니라,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앞뒤 좌우로 흔드는 부드러운 힘이고(‘뻘에 말뚝 박는 법’), ‘강철 면도날 수백 개/ 밀어 온 수염’(‘뿌리의 힘’)의 힘이다. 그것이 뻘의 힘이고, ‘말랑말랑?7? 힘’이고 시인의 힘이다.
보증금 없는 월세 10만원짜리 동막리 그의 집 방 한 켠에 늙은 호박이 있었나 보다. 시인은 그것을 쳐다보고 껴안고 함께 뒹굴며 추운 겨울 시린 마음을 녹였는데,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이지만 봄이 되자 곰팡이도 피고 물컹물컹 썩는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물을 열고 걸어나가네/ 자, 出世다’(‘호박’).
이 도도하고 고고한 출세주의자에게도 스스로를 자책하고 위로할 때가 있다. 거절 못해 번사에 휘둘리거나 술에 절어 늦잠을 잤을 때, 문우들이 보낸 책을 읽지 못하고 쌓아만 둘 때, 막연히 헤매5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럴 때 그는 나비를 생각한다.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나를 위로하며’)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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