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한 달여가 돼 갈 무렵, 신생지 한국일보가 자리를 잡아가는 길은 역동적이었다. 그런 만큼 일은 늘어가는데 일손이 모자랐다. 스카우트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때 최병우가 견습기자 모집을 건의했다. 대학을 갓 나온 사람을 뽑으면 당장은 크게 쓸 모가 없겠지만 얼마 안 가서 신문이 뭔가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기성 기자보다도 정의의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었다. 또 당시 젊은 엘리트들은 은행, 관공서와 함께 신문기자직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뽑아 쓰면 나중에 취재원 접근에도 크게 유리할 것으로 보았다. (한국일보 50년사)
■ 훗날 관훈클럽의 ‘최병우 국제보도상’으로 추모되는 그는 창간 동인으로 당시 외신부장을 맡고 있었다. 장기영 사장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54년 7월 21일자에 사고가 나간 뒤 논문 시사상식 모의취재 영어 면접 시험을 거쳐 견습 1기 6명이 8월1일자로 입사했다. 한국 언론사 공채의 효시였다. 이후 해마다 이어진 기자공채는 한 신문사의 제도에 그치기 보다는 우리 사회제도의 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 당시에는 6·25전쟁 후의 혼란과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할 때였다. 사람을 쓰는 데 지%1熾? 혈연을 비롯해 여러 뒷거래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국일보의 견습기자 제도는 그런 사회비리에 대한 역풍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고 회고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언론 엘리트 구조와, 닫힌 방식의 인력 충원 질서를 깨뜨리는 충격이 되었다는 학자의 시각도 있다. 그때까지도 유능한 주필이나 편집국장 등의 논객들은 여럿이 함께 신문을 옮겨 다니는 풍토가 있었고, 독자들도 이들을 따라 움직이곤 했다.
■ 창간 50주년을 지낸 한국일보는 이제 12명의 견습 66기를 맞는 중이다. "세상을 재단하기 보다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조금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천박한 자본논리와 가벼운 농담에 파묻혀 몽롱해 가는 세상. 겨울 새벽 차가운 쇳덩이를 만질 때의 섬뜩함과 같은 기사를 쓰고 싶다"는 견습들이다. 다른 66기는 "따뜻한 눈물로 보통 사람들의 곁에 서 있고 싶다"고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새하얀 백지 상태가 두렵고 불안하다"고도 한다. 신선한 초심들이다. 몇 년 전 기자 40년을 맞은 대선배로부터는 "신문제작은 매일이 견습이다. 기자는 신문을 언제까지나 견습기자처럼 두려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신문에는 초심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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