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최종길교수 유족 손배訴 패소/ 법원 "소멸시효 지나…국가 배상책임 없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최종길교수 유족 손배訴 패소/ 법원 "소멸시효 지나…국가 배상책임 없다"

입력
2005.01.27 00:00
0 0

1973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다 숨진 최종길(당시 42세) 서울대 법대 교수에 대해 법원이 가혹행위 등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국가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87년 발생한 수지 김 살해사건에 대해 2003년 8월 내려진 "국가 등이 42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상급심의 판단이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3부(이혁우 부括樣퓨?)는 26일 최 교수의 유족이 국가와 당시 수사관 차모씨를 상대로 낸 67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에 대한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다만 차씨가 2002년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최 교수가 북한에서 사상교육을 받은 사실을 자백한 뒤 자살했다"고 말하는 등 최 교수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 점을 인정, "차씨는 유족에게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73년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구속영장도 없이 최 교수를 구금, 수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가혹행위가 있었던 營퓽?인정되지만 2002년에서야 소송을 제기한 만큼 소멸시효(불법행위 발생시점으로부터 5년 또는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가 지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유신정권이 종료된 79년까지는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88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명의로 검찰에 진정을 제기한 시점부터는 장애사유가 소멸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노태우 정권 이후 정치적·사회적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원고들이 주장하는 장애사유는 늦어도 소송이 제기된 2002년부터 역산해 5년이 되는 97년 이전에 모두 소멸했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국가가 진상을 밝히려는 어떤 노력도 기?2울이지 않았다는 원고측 주장에 대해 "민법상 가해자가 진상을 규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며 "도의적인 명예회복 의무는 몰라도 국가에 법률상 의무는 없다"고 판시했다.

한편 간첩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수지 김 사건에서 법원은 "국가가 위법행위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信義)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며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주장은 이유 없다"고 판결했고, 국가는 항소를 포기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번 판결에 대해 최씨 유족측은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최 교수 ?%틉湧? 최광준(41) 경희대 교수는 "88년부터 소송이 가능했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납득할 수 없다"며 "국가기관이 범행하고 국가가 조작, 은폐해 온 사건에 대해 어떻게 미약한 국민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었겠느냐"고 항소 의사를 내비쳤다.

원고들은 최 교수 사망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해 오다 2002년 5월 의문사진상규명 위원회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숨졌다"고 발표하자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지난해 7월 소멸시효에 대한 판단은 미룬 채 "국가의 책무, 원고들의 고통 등을 감안해 국가는 원고들에게 최 교수 기념사업 비용 등 10억원을 지급曠灸?"는 내용의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으나 유족들은 "명예회복이나 소멸시효에 대한 판단 없이 배상액만 정하는 화해조치는 합의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崔교수 사건’이란

1973년 10월19일 새벽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중앙정보부 남산 합동심문실 건물 옆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유신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최 교수가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 감찰실 직원이었던 동생 종선씨와 함께 출두한 지 3일 만의 일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동·서유럽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54명을 적발했으며 최 교수는 간첩임을 자백하고 7층 화장실 창문으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88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최 교수 사망 사건에 관해 진정을 하자 검찰은 이듬해 8월 "최 교수가 간첩활동을 자백한 뒤 자살했다는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가 있고 이미 공소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내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최 교수의 죽음은 국내 ‘의문사 1호’로 기록됐고 2002년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8회는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자백한 사실이 없고 당시 심한 고문 및 모욕 등을 당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한 자로 인정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