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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을 물었더니-이기창 대기자의 선지식과의 대화] 예산 수덕사 설정(雪靖)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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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을 물었더니-이기창 대기자의 선지식과의 대화] 예산 수덕사 설정(雪靖) 스님

입력
2005.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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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판(事判)을 떠나면서 모든 것을 정리했고 말을 않고 살려고 했는데… 다시 선방생활로 돌아가니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을 잊게 되더군요."

충남 예산 수덕사(修德寺)로 설정(雪靖·63)스님을 찾던 날은 매서운 추위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어느 봄날처럼 따뜻했다. 그 봄날의 미소를 머금은 스님은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스님이 말한 사판이란 1990년대 후반 종회의장을 맡은 일을 이른다. 절집에선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을 이판(理判), 행정과 포교를 담당하는 스님을 사판이라고 나눠 부른다. 스님의 법문에 목말라 하는 이들이 많은데 너무 문을 닫아 걸면 그들이 섭섭해 하지 않겠느냐고 에둘러 말을 건넸다.

"그 반대가 아닐까요. 말의 공해가 난무하는 요즘 세태에 입을 닫고 있는 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말과 침묵의 관계로 들린다. 스님은 덕숭총림의 수좌가 아니던가. 수좌란 선방스님들의 가장 큰 어른이다. 선문에선 말과 침묵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말과 침묵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말이 곧 침묵이고 침묵이 곧 말인 것이니, 말이란 말하지 않는 가운데 말함(無說說·무설설)이요, 침묵이란 말하는 가운데 말하지 않음(說無說·설무설)이라고.

밖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스님은 "점심공양이나 들고 하지요"라며 안내한다. 공양간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막 지나고 있다. 새벽 3시 예불을 시작으로 새날을 여니 산사의 일상사는 세간의 그것에 비해 한참 이르게 진행될 수 밖에. 공양을 마치고 나니 스님과의 거리가 한결 좁혀진 느낌이다. 묻고 또 묻는 것이 기자 된 자의 직분이거늘 어쩌랴. 내친 김에 한 발 더 나아갔다. 스님들 말씀은 다 옳은데 보통사람이 실천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뿐더러 그렇게 살면 너무 재미없지 않느냐고. 스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경전에 나오는 설화를 들어 우리네 삶에 비유한다.

‘한 남자가 살인코끼리를 피해 도망을 치다가 낡은 우물을 발견했다. 우물 속으로 두 가닥의 등나무 줄기가 뻗어 간 것을 발견하고 그 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안도의 한 숨을 쉬던 그는 밑을 쳐다보고 비명을 질렀다. 독이 바짝 오른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살피니 흰쥐와 검은 쥐가 등나무 줄기를 갉아먹고 있었다. 戮?목숨이라고 체념하고 있던 그의 얼굴로 뭔가 똑똑 떨어졌다. 등나무 줄기의 벌집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한 방울씩 받아 먹으며 "아! 달다"?연신 기뻐했다. 달콤한 맛에 취한 그 사내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도 잊었다.’

코끼리는 항상 변하는 세태, 우물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다. 등나무 줄기는 사람의 생명, 독사는 지옥, 흰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세월)을 의미한다. 꿀방울은 오욕(재물 이성 명예 음식 수면)을 가리킨다.

육신이란 때가 되면 결국 대지에 버리고 가는 낡은 옷과 같은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욕에 빠져 살아갑니다. 사실 그게 인생일 겁니다. 허나 오욕은 일시적 즐거움은 주겠지만 영원한 즐거움은 못 줍니다." 이 말 끝에 스님은 덕담을 내놓는다. 삶이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고 도전하는 과정에서 희망의 길이 보인다. 그런 의지가 삶의 자리에 자리잡을 때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이라는 보배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심전(心田·마음밭)경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심전경작은 가치관의 정립입니다. " 스님은 지성(智性) 덕성(德性) 용성(勇性)은 인간의 삼덕이며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근본마음이라고 일깨운다.

"우리사회가 산업화과정에서 진짜와 가짜, 진리와 거짓을 가릴 줄 아는 지성이 부족했고 남을 배려하는 덕성마저 외면하는 바람에 이기심이 팽배해졌습니다.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 중에는 마땅히 지녀야 할 덕성과 양심을 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국민은 그런 삶을 보고 절망합니다." 스님은 치유방법으로 관용의 미덕을 제시한다. 사회는 관계적 존재에 의해 지탱되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상생이 가능하다. 스님은 가진 사람들의 선(善)의 의지를 아쉬워한다. 달리 말하면 덕성의 회복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개혁을 바라보는 스님의 시각은 어떠할까.

"사심을 버리는 게 개혁의 첫 걸음입니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삽니다." 개혁을 앞세운 사람들이 정직하고 진실하지 못한 까닭에 지금까지 개혁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스님은 공자의 가르침을 빌려 신뢰가 왜 중요한지 설명한다.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중요성에 따라 식(食) 병(兵) 신(信)의 순서로 꼽았다. 제자인 자로가 부득이하게 셋 중에서 빼야 할 경우 그 우선순위를 물었다. 공자는 병, 식의 순서로 제외하라고 가르친다. 국가경영에 있어 신은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국민이 잘 먹고 통치자와 백성이 서로 믿으면 국방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또 경제가 어려워도 믿음이 살아 있으면 못할 것이 없지요. 결국 불신이 망국병의 근원입니다. 인사파동이 일 때마다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양심과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큰 일을 맡기면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스님은 무엇보다 가정의 위기를 안타까워한다.

사랑에는 두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상대를 연민으로 바라보고 무조건 위하는 사랑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사랑이지요. 불교적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주면서 한없는 기쁨을 맛보는 거지요. 일러 무애(無碍)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가끔 주례를 선다. 사랑도 못해본 사람이 주례를 선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고 전제를 단 스님은 4가지를 강조한단다.

"첫째가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하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서로 보물 대하듯 소중하게 여기고, 상대를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며, 마지막으로 무조건 양보하라고 들려줍니다."

게송을 청했더니 경허선사의 5세 법손(法孫)답게 선사의 깨달음의 노래를 들려준다.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傍人若問惺牛事(방인약문성우사)

石女心中劫外歌(석녀심중겁외가 )

속세와 청산 어느 쪽이 옳으냐

봄빛에 꽃피지 않는 곳 없구나

누가 경허의 가풍을 묻는다면

석녀의 마음 밖 노래라 하리라

세간과 출세간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진리는 삼라만상에 두루 존재해 있음을 밝히는 게송이다. 설정스님이 이르는 도는 어렵지도, 먼데 있지도 않다.

남을 어렵고 불편하게 만들지 않도록 마음을 쓰는 것만으로도 수행은 깊어진다. 누구에게나 정성을 다 할 때 양심과 덕성이 살아난다. 곧 마음밭을 가는 일이고 가치관을 정립하는 길이다. 그게 바로 일상에서의 깨달음인 것이다.

lkc@hk.co.kr

■ 설정스님은…

설정스님의 거처는 정혜사(定慧寺)다. 수덕사 덕숭총림의 선원이 여기다. 수덕사 일주문에서 가파른 산길을 타고 30, 40분쯤 오르면 덕숭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정혜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총림이란 선원 강원 율원을 갖춘, 속세의 기준으로 보면 불교의 종합대학 격인데 조계종에는 모두 5개의 총림이 있다.

"정혜사는 한국선의 중흥지입니다. 한말 경허선사가 꺼져가던 선의 불씨에 불을 지핀, 뜻 깊은 도량이지요." 설정스님의 말에선 한량없는 긍지가 배어나온다. 경허선사의 3대제자인 수월 혜월 만공스님도 여기서 깨달음을 성취했다.

스님은 발심에 이끌려 출가한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절집과의 인연은 깊었다. 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수덕사를 자주 찾았다. 부친은 당시 만공선사에게 계를 받았을 만큼 신실한 불자였다. 출가는 그야말로 우연히 이뤄졌다. 부친의 생일 날 수덕사를 찾았고 그 길로 속세와 인연을 접게 됐다. 열 셋의 동진출가였다. 처음에는 며칠 지낼 요량이었지만 어머니와 형(전흥수·목공예 인간문화재)이 데리러 올 때마다 숨었다. 현재 덕숭총림의 원담(圓潭)방장이 설정스님의 은사다.

스님은 30대에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망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예학을 전공으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찰에는 산림과 토지가 많거든요. 사찰의 자급자족은 물론 중생구제를 위해 산림과 토지를 활용할 방법을 배우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겁니다. 하지만 당시 세속의 교육에 쏟았던 시간과 정력을 수행에 돌렸다면 소기의 목적에 보다 일찍 접근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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