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신이라도 찾아야 눈 감겨 줄텐데"
"불쌍한 우리 영감. 시체라도 찾아와야 내 손으로 눈이라도 감겨줄 텐데…."
25일 낮 고려대 안산병원의 한 병실. 한달 전 가족과 함께 떠났던 휴양지 푸껫에 들이닥친 지진해일(쓰나미·津波)로 두 다리에 부상을 입고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있는 이인순(55·여)씨에게 그날의 악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푸껫 인근 피피섬으로 놀러갔다 남편 정형진(당시 47세)씨와 외손자 박민혁(당시 4세)군이 변을 당했다. 박군은 시신이라도 수습했으나 남편은 아직도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씨는 "날마다 눈만 뜨면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과 여행사에 남편의 소식을 묻곤 한다"며 "하루 빨리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가 26일로 발생 1개월째를 맞았지만 20명의 실종·사망자 가족들에게는 아직도 씻을 수 없는 고통으로 남아있다. 사고가 나자 앞 다퉈 현지로 떠났던 실종자 가족들은 10여일이 지나면서 사실상 실종자 수색을 포기하고 모두 국내로 돌아온 상태다. 이들은 매일같이 외교통상부나 태국주재 한국대사관 등에 문의를 하다 새로운 소식이라도 나오면 연락을 취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이들 실종자 가족들은 한결같이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속에서도 "정부의 무성의한 대응이 원망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태국 카오락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된 조상욱(28)씨의 어머니 여연희(55)씨는 26일 서울역에서 열릴 예정인 쓰나미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서울로 향하는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씨는 "아무리 천재지변이라지만 여태껏 시신조차 못 찾고 있는데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반문한 뒤 "며느리(이혜정·당시 27세)는 유골이라도 돌아와 인근 사찰에 안치했지만 아들 시신이 없어 함께 납골당 안치도 못하고 있다"고 울먹였다.
이씨와 여씨의 경우처럼 이들 실종자 8명의 가족들은 대부분 기적적인 생환 소식이 혹시나 들려오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저버리지 않은 채 한달 째 연락이 끊긴 ‘없어진 가족’의 사진만 부여잡고 있다.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수는 총 12명. 이 중에는 모자와 모녀, 장모와 사위가 한꺼번에 사고를 당한 경우가 많아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오병관씨는 부인 이미옥(당시 37세)씨와 장남 승원(당시 10세)씨를 모두 잃었다. 오씨는 "갑자기 물이 밀어닥쳐 어린 작은 아들을 지붕 위로 올리고 뒤돌아보니 아내와 큰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며 "저 세상으로 간 두사람의 몫까지 합해 작은 아들과 함께 꿋꿋이 살 생각"이라고 말했다.
또 김형순(당시 44세·여)씨는 딸 임정은(당시 19세)양과, 황보태임(당시 66세·여)씨는 사위 윤성환(당시 41세)씨와 함께 변을 당했다.
이밖에 아직도 피해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신고됐으나 소재가 불분명한 미확인자 수도 25명에 이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현지에서 유해발굴 작업과 DNA 감식작업을 계속하고 있어 이들 중에 실종자들의 시신이 확인될 수 있다"며 "이젠 현지에서 진행되는 작업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 한국인 사망·실종자 20명/ 더이상 크게 늘지 않을 듯
남아시아 지진해일로 인한 한국인 피해는 25일 현재 사망 12명(태국), 실종 8명(태국 6명, 인도네시아 2명), 소재 미확인 25명으로 집계됐다.
실종의 경우 피해가 집중됐던 태국 푸껫 인근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가족들조차 사망 가능성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따라서 현재 사망자 규모를 20명으로 추정해도 크게 무리는 아닌 듯 하다.
하지만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소재 미확인 25명을 재난 피해자로 간주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게 외교부의 설명이다.
25명(남성 19명, 여성 6명)의 행선지별 현황은 ▦태국 17명 ▦인도 4명 ▦인도네시아 2명 ▦기타 2명이며, 연령별 현황은 ▦50대 3명 ▦40대 9명 ▦30대 8명 ▦20대 2명 ▦10대 이하 3명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연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과 재난피해와의 직접적 연계는 확실치 않다.
태국 내 소재미확인자 17명 중 무려 6명이 회사 부도 및 범죄 등을 이유로 도피중인 이들이고, 가정불화나 별거 등으로 장기간 가족들에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는 이들도 상당수다.
인도 내 연락두절자의 절반은 종교순례자다. 이준규 외교부 영사국장은 "현재까지 소재 미확인자들을 재난피해자로 볼만한 직접적인 정황은 뚜렷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국제 공조 현황/ 구호금 70억弗 약속해놓고… 실제 조기집행 7억弗 그칠듯
남아시아 지진해일은 28만~30만명의 목숨과 200만명의 생계수단을 앗아간 사상최악의 자연재해이다. 동시에 가장 많은 나라가 사상최대의 지원을 약속해 국제구호활동의 기록을 세운 재해이기도 하다. 미국 일본 유럽 등이 경쟁적으로 구호계획을 발표해 지원액수 순위가 올림픽 메달 집계처럼 하루걸러 바뀌었다. 열강의 아시아를 향한 미소작전은 ‘쓰나미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남아시아의 공포는 계속되고 있다. 인도 안다만·니코바르 군도에선 ‘섬이 가라 앉는다’는 괴소문으로 주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 인도네시아 셀레베스섬에선 리히터규모 6.2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제2해일이 엄습할까 대피소동이 빚어졌다. 이런 가운데 국제사회의 약속은 조금씩 말의 성찬?불과한 ‘식언(食言)’임이 드러나고 있다.
재발방지 대책의 핵심인 조기경보체제도 표류할 조짐이다. 유엔은 금년 중 경보시스템이 구축돼 가동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 고베(神戶)에서 열린 유엔재난방지세계회의는 참가국들의 엇갈린 이해만 확인하고 22일 해산했다. 주요 참가국들이 자국의 기술과 체제를 고집하면서 인공위성을 이용한 지구관측과 정보의 공유, 전문가 네트워크 구성은 10년 뒤인 2015년으로 미뤄졌다. 유네스코(UNESCO)는 3월 이견조정을 위한 실무회의를 열 계획이지만, 관련국간 입장차이가 워낙 큰 상황이다.
국제사회가 약속한 구호금은 약 70억 달러나 된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쓰나미로 인해 빈곤에 빠질 것으로 추산한 200만명에게 3,000달러 이상씩 지원할 수 있는 거금이다. 그러나 10억 달러를 약속하고, 1,750만 달러만 건네준 이란지진의 전철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는다. 유엔은 이 달 6일 당장 필요한 9억7,700만 달러의 조기집행을 요구했지만, 앞으로 6개월 안에 7억 달러만 집행이 가능할 것이란 예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호활동은 부상자 치료 등 긴급구호에서 장기 재건지원으로 바뀌고 있다. 피해지역에 긴급 투입된 외국군대는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있고, 세계 언론의 현장보도 또한 뜸해지고 있다. "자연재해가 테러보다 훨씬 큰 위협이며, 재해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는 교훈도 잊혀져 가고 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 이모저모/ 아체선 한달간 800여명 태어나 ‘새 희망’
남아시아 지진해일의 최대 피해지인 인도네시아 아체지역에선 한달 동안 신생아 800여명이 태어났다. 이곳에선 아기울음 속에 ‘희망의 삽질’을 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한때 40만명이 사망했다는 추정치가 나왔던 인도네시아는 25일 현재 22만8,429명이 숨지거나 실종된 것으로 최종 집계됐다. 남아시아지역 전체의 쓰나미 희생자는 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28만명을 상회하고 있다. 14만명을 넘는 실종자 가족들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피해국들은 실종자를 사망자로 분류하고 있다. 실종자 가운데 구조된 사람은 19일을 마지막으로 6일째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엄청난 인명피해에 비춰 쓰나미가 경제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최대 피해국인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의 경우 경제성장률이 당초 전망치보다 0.3~1.4% 하락에 그칠 것이란 예상이다. 재건을 위한 투자, 국제사회의 채무면제 등은 오히려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만 태국 스리랑카 등 관광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향후 관광산업이 휘청일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세계의 구호금 경쟁에선 최종적으로 호주가 1위, 독일이 2위를 차지했고 미국은 5위로 밀려났다.
이번 쓰나미의 최대 피해자는 인도의 ‘불가촉 천민’(untouchable)이라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카스트 신분에도 끼지 못하고 ‘달릿’(dalit)으로 불리는 이들은 지독한 냄새를 참아가며 쓰나미 희생자의 부패한 시신을 처리했다.
그러나 오염의 근원이라는 인도사회의 편견 탓에 정부 구호캠프에서도 내쫓김을 당하고 있고, 구호물품 지급도 받지 못하고 있다. 앞서 스리랑카에서는 생존자 아기를 둘러싸고 9명의 여성이 서로 "내 아기"임을 주장했던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했다. 보름이상 논란 끝에 아기 엉덩이에 점이 있다고 말한 미용사가 아기의 어머니에 ‘당첨’됐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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