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단어에는 복수가 없다. ‘나’의 복수인 ‘우리’란 ‘나’와 ‘너’일 따름이다.""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앞의 글은 프랑스 한 문법책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뒤는 1970년대 유신시절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앞부분이다. 공동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앞의 글이 지나친 서구적 개인주의를 상징한다면 뒤의 문장은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국가주의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아니, 국가주의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국가지상주의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왜 민족중흥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단순히 민족중흥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가? 한마디로 말도 되지 않는 국가의 폭력이다.
이번에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문서들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인 국가주의의 횡포를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이 문서들은 65년 한일협정이 과거사 평가와 개인의 권리를 외면한 한, 일 두 국가권력집단 간의 정치적 야합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청구권 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피해자들의 개별 청구권을 포기해버린 것은 국가주의의 극치다. 꽃 같은 청춘을 성 노예로 바쳐야 했던 수많은 군대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징용, 징병 등 36년간 수많은 이 땅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어떻게 박정희 정권이 단순히 국가권력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던져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하긴 박정희 자신이야 일제시대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로 호의호식하고 있었으니 그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이해하고 배려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권은 그랬다고 치고, 정작 무서운 것은 이문서가 공개된 바로 현 시점에서도 국가라는 이름아래 박정희를 옹호하는 의견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다. 부친때문에 이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그 한 예이다. 박 대표는 이번 기회에 정부가 일제 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협정 당시 우리가 너무도 가난하고 어려워 그 돈으로 경제발전을 위해 쓴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사실상 피해자들의 개별 청구권 박탈이 당시로는 경제발전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수구언론들도 개별 청구권에 의해 청구권 자금을 피해자들에게 나눠줬으면 지금 같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겠느냐며 박정희 정권의 정책적 선택을 옹호하고 있다. 국가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성찰 없이, 실체 없는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필요악이라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군대위안부 문제를 비판하는가? 우리가 국가주의의 입장에 설 경우 대일본제국의 발전을 위해 군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이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해줄 대상이 필요했다는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을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이번 문서공개를 계기로 당연히 일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등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국가지상주의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다.
물론 서구식의 지나친 개인주의도 문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개인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국가주의의 과잉이다. 사실 국가보안법의 문제도 극우반공주의의 문제이기 전에 국가주의의 문제다. 왜 국가가 개인의 사상을 규제하느냐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신념 등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여 대체근무제를 도입함으로써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현재의 국가주의적인 징벌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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