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3·1절에는 큰할아버님께 면목이 좀 설 것 같아 기대됩니다. 하지만 재작년, 작년 광복절 때도 다 된 것처럼 얘기가 나왔지만 눈물만 흘리고 말았어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을 빨갱이라고 떠드는 세력이 아직도 있으니 안심이 안됩니다."
몽양의 손자인 여인구(38)씨는 국가보훈처가 20일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 기준을 완화해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적극 협력하지 않은 인물은 유공 서훈을 할 수 있다고 발표한 데 대해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이 기준에 해당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몽양이기 때문이다. 그는 몽양선생추모사업회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몽양의 4남 3녀 가운데 현재 남한에 직계자손은 없다. 북한의 직계혈육도 세 딸 중 여원구(74)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의장만이 생존해 있다. 인구씨는 몽양의 유일한 동생(운홍·運弘)의 둘째 아들 명구(80)씨의 막내 아들이다. 아버지가 2001년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광고 관련 개인사업을 그만두고 추모사업회 일을 떠맡고 있다.
"2003년에야 처음으로 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세상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선뜻 행동에 옮기진 못했지요. 지난해 광복절 직후 보훈처로부터 큰할아버지 건은 보류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광복 후 근로인민당 당수 경력이 공산주의자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어요. 서훈을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고, 껄끄러운 문제라고 매년 다음해로 넘기는 것이었어요. 보훈처가 사상 검증 기관인가요? 그렇다고 몽양의 독립운동이 민족사에 끼친 공헌이 없어지나요?"
인구씨가 몽양이 김 구 선생과 같은 1급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를 고대하는 이유는 오로지 명예회복을 위해서이다. 어차피 금전적 보상은 규정상 직계가족만 해당된다고 한다. "어른들로부터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습니다. 큰할아버지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파리와 모스크바, 도쿄 등을 누비며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풍찬노숙했고, 좌우 갈등이 극심했던 해방 정국에서는 중도파인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선생 등과 함께 분단을 막기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입니다. 사회주의도 민족을 일제에서 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지요. 민주화 정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지만 선심 쓰듯 은전 베풀 듯 몽양 같은 분들을 이제서야 인정하겠다는 것은 사실 반갑지는 않습니다."
영동고와 단국대 사학과를 나온 그의 원래 事?역사학자였다. 큰할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 때문에 공무원의 길은 애초에 포기했다. 군 복무 시절 장교들이 거북해 하고 기무사에서 가끔씩 그의 언행을 체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큰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나면 친할아버지 서훈도 추진할 계획이다. 운홍 선생도 형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두 할아버지 형제가 태어나 자란 경기 양평의 생가도 복원할 계획이다.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북한에 있는 제 또래 6촌들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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