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에 대한 미련으로 문학을 택했지만, 철학이 이루지 못한 것을 문학으로 성취한 작가다. ‘그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의 영광이 아니라 노벨상의 영예’라는 헌사가 과장되게 들리지 않는 이 노작가의 작품집 ‘사랑의 야찬’이 번역돼 나왔다.
원래 프랑스어판 책에는 19편의 옴니버스식 이야기가 실려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 지식인 남성들의 공허한 수다에 신물이 난 한 부유한 인텔리 여성이 우직하고 과묵한 뱃사람에게 반해 결혼하지만, 차츰 침묵 역시 수다만큼 공허함을 깨닫고 헤어지기로 한다. 부부는 밤이 가장 짧은 하짓날 밤에 가까운 사람들을 초청해 이별의식을 치른다. 손님들이 돌아가며 19편의 짧은 사랑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사이 먼 동이 터오고, 예정된 그 이별 선언의 순간에 부부는 말이 없다. 번역된 책에는 손님들의 이야기 가운데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9편이 실려있다.
알다시피, 투르니에는 다층적인 글쓰기로 세대의 미감을 아우르는 거장이다.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소설과 현대지성사를 꿰뚫는 산문에서부터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읽고 즐길 수 있는 동화 같은 콩트까지 층위가 다양하다. 이번 책은 신화적 모티프에서 신성성을 걸러낸 뒤, 거기서 철학적 메시지를 끌어내는 그의 독보적 문학세계와 매혹적인 글 솜씨를 맛볼 수 있는 편한 글들로 구성됐다.
가령 ‘음악과 춤에 관한 전설’은 구약 창세기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 작품에서 선악과 대신 ‘음악나무 열매’를 따먹는다. 태초에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며 내는 모든 소리는 그대로 천상의 음악이었지만, 그들이 음악나무 열매를 먹자마자 신의 음악은 멈추고 적막이 시작된다. 거기서 인간의 역사 음악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향수에 관한 전설’은 음악 대신 향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작가에게 향수는, 음악이 그러했듯 ‘저마다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의 낙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짚북데기 위의 아기’에서는 현대사회의 병리가 왜곡된 출산문화에서 기인한다는 ‘학설’을 경쾌하게 전개한다. 이 작품은 약물중독 병원중독 폭력 등 만연한 재앙을 두고 고심하던 대통령이, 어린시절 자신의 주치의의 말을 국민에게 전하는 형식이다. 그 논지는 모든 생명체는 최초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태어나자마자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보고 느끼는 살균 마스크와 가운 소독약 냄새가 현대병리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출산의 환경을 누구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선언하는데, 작가는 자못 진지해지려는 작품 분위기가 못마땅했던지 결말 부분에 웃음의 함정을 파놓고 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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