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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저격사건 외교문서 공개/ 韓"조총련 개입" 日"단독범행" 엇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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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저격사건 외교문서 공개/ 韓"조총련 개입" 日"단독범행" 엇갈려

입력
2005.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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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日 외교분쟁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은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단교를 검토할 정도로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미국의 중재로 파국을 맞지는 않았다. 한일 양국의 대립은 사건을 보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기인했다. 한국은 문세광이 조총련 간부 김호룡을 통해 북괴의 지령을 받아 사건을 저질렀다는 시각이었지만, 일본은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개해 박정희 독재체제를 타도하려는 문세광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인식했다.

사건 초기 문세광이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 명의의 일본 여권을 소지한 사실이 드러나자 노신영 炳ヂ耽活?우시로쿠(後宮)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일본인이 아닌 문세광에게 일본 여권을 발급해준 것은 분명히 하자가 있다"고 책임을 강도 높게 추궁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는 재일 한국인의 범죄로 일본 정부는 법률적, 도의적 책임이 없다"며 조총련 개입을 주장하는 한국측 수사결과를 전면 불신했다. 사태가 악화하면서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공개 비난한 데 이어 한국 시위대가 주한 일본 대사관에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 단교 가능성을 시사했고, 일본 특사로 방한한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자민당 부총재에게는 "한 때 우리는 일본을 우방으로 인정할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한국으로부터 "일본이 조총련을 수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하비브 국무부 차관보는 "미국은 우방인 두 나라가 원만히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조용히 일본측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결국 ‘일본은 응분의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수상의 친서가 박 대통령에게 전달됨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됐다.

한국의 대일 강공은 1년 전인 1973년 8월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을 일거에 만회하려는 전술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사건 후 DJ납치 사건에 연루된 한국 외교관의 신병을 인도해달라는 일본측 요구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사건개요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은 재일동포 문세광이 박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한 비극이다.

문세광은 74년 7월 일본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친 뒤 일본인 명의의 여권으로 한국에 입국, 8월15일 기념식장인 서울 장충동 국립국장에 입장했다. 박 대통령이 기념사를 낭독하던 도중 문세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총 4발을 발사했으나 박 대통령은 무사했고 육 여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았다. 또 합창단원인 여고생 1명이 경호원의 오발탄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 문세광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고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이날 오후 사망했다.

수사본부는 이틀 뒤 문세광이 74년 5월 북한 만경봉호에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矩?지령을 받았고 7월 조총련 간부 김호룡으로부터 공작금 80만엔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문세광은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남은 의혹들

문세광은 사건발생 128일만인 74년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30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① 육 여사는 누구의 총탄에 맞았나

이중 가장 대표적인 의혹은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희생됐느냐 여부다. 한국 정부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사건 현장에서 울린 총성은 모두 7발. 문씨는 5발이 장전되는 스미스 웨슨(일명 리볼버) 권총을 사용했고, 모두 4발을 발사했다. 3발은 경호원이나 또 다른 누군가가 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법원은 육 여사가 문 씨의 제4탄에 맞았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이던 고 이건우씨는 89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탄흔을 분석하면 육 여사는 문의 총탄에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수사결과와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발언을 했다. 문이 아닌 경호원의 총탄에 희생됐을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발언이어서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② 제3의 저격수 있었나

문세광은 오른쪽(육 여사 쪽에서 볼 때)에서 총을 쐈기 때문에 육 여사는 왼쪽으로 쓰러져야 했으나 오른쪽으로 쓰러졌다. 당시 외신들은 문세광 반대편에 있던 또 다른 저격수에게 희생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화면 분석 결과 육 여사는 총성과 함께 일단 왼쪽으로 흔들렸다가 오른쪽으로 쓰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③ 현장경호가 왜 허술했나

문세광이 비표도 없이 승용차를 타고 식장에 입장하고, 유독 총기검색이 없었던 당시 상황도 석연치 않다. 청와대 경호실은 광복절 직전의 열린 한 국빈행사에서 경호요원들이 참석자들의 핸드백까지 일일이 검색해 민원이 생기는 바람에 사건 당일 검색을 완화했다고 인정했었다.

④ 한일 수사결과 왜 그렇게 달랐나

사건 발발 이틀 뒤 발표된 한국측 수사결과는 4개월 후의 일본측 수사결과와 판이했다. 일본 수사기관들은 문세광이 북한과 조총련 간부의 지령을 받았다는 한국측 발표를 전면 부인하면서 박정희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문세광의 범행 의도를 부각했다. 일본측은 이에 따라 문의 공동정범으로 지목됐던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를 여권관리법위반 혐의로 구속한 뒤 풀어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⑤ 김대중 납치사건 희석용?

정치적으로는 1년 전 발생했던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게 수세로 몰린 한국 정부가 저격 사건을 조작했다는 유언비어를 낳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문세광이 조총련보다는 친한 단체인 민단에 가까웠던 인물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영섭기자

■ 저격사건 후폭풍/ 차지철 2인자 부상…10·26사태 ‘씨앗’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은 유신의 절대 권력이 비극으로 종말을 고하는데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 사건이 당시 권력 지형을 일거에 바꾸면서 박 대통령 친위 세력을 물갈이 했고, 그때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권력 2인자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결과적으로 10·26 사태를 불렀기 때문이다.

저격사건의 유탄은 가장 먼저 ‘피스톨 박’으로 불리면서 당대 최대 실세로 통했던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향했다. 박 실장은 자신과 충성 경쟁을 벌이던 차지철 국회 내무위원장에게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15년간 향유한 권력의 단맛을 잊어야 했다.

박 실장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를 맡은 이래 63년 청와대 경호실 창설과 함께 차장에 취임한 데 이어 실장으로 승진했다.

숱한 부침을 통해 권력의 기반을 다졌던 김종필 총리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게도 정치적 타격이 가해졌고,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김용태 원내총무 등 공화당 지도부와 백두진 국회의장, 민병권 원내총무 등 유정회 간부들도 일괄 사표를 내야 했다. 특히 사건 당시 휴가 중이었던 김 총리는 한동안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치안 책임자인 홍성철 내무장관과 박종규 실장 등 두 명에게만 책임을 묻고 나머지 사람들의 사표를 반려했지만, 양택식 서울 시장은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기념식 단상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보도로 사표를 내야 했다. 양 시장은 김용태 총무로부터 "사임해야 마땅하다"는 공개 비난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르다 사건 열흘 만에 물러났다.

이후 박 대통령의 총애를 독점한 차지철 경호실장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과 충성경쟁에 몰입, 박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차지철의 사람들’은 하나 둘 권력실세의 자리에 올랐다.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린 육영수 여사의 사망 후 고독해진 박 대통령은 사생활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했다는 게 정설이다. 박 대통령의 큰 딸 근혜씨는 이때부터 어머니를 대신해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수사 참여 김기춘의원/ "日, 文 직접 수사 못해 한일 수사결과 달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 보좌관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한나라당 김기춘(사진) 의원은 20일 "당시 수사 및 재판 기록이 명백한 진실"이라며 "오늘 공개된 외교문서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한국과 일본의 수사 결과가 다른 것에 대해 "일본 수사 당국은 문세광을 직접 조사하지 않았고, 한국도 일본 내 공범을 조사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문세광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었고,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어 강압 수사할 사안도 아니었다"고 한국 측의 수사조작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의혹이 있었다면 당시 일본 총리가 친서를 보내 박 대통령에게 사과를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의원은 허술한 경호와 육영수 여사를 쏜 제3의 저격수 존재의혹 등에 대해 "한국전쟁을 북침이라고 하고, 김현희를 가짜라고 하는 세상에 무슨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겠느냐"며 "수사 당시엔 그런 논란이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어 "공개된 문서는 사건발생 30년이 지났으니 충분히 공개할 수 있다고 본다"며 "이 사건은 의문사 사건 등과는 달리 정치적 악용 소지가 없으며, 간단히 말하면 하나의 살인 사건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대통령 암살범을 다룬 소설인 ‘자칼의 날’을 인용해 사건 당일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의 입을 처음 열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의원은 "문세광은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공산주의를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하러 왔다고 했다"며 "‘혁명가가 비겁하게 굴지 말고 한 일을 당당하게 밝히라’고 추켜 세우니 순순히 진술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 기타공개 문서들/ 홍콩동포, 陸여사 빈소에 弔意 다이아목걸이 보내

20일 공개된 1974년 외교문서에는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외에 700여쪽 분량의 ‘육영수 여사 장례식’ 관련 문서도 포함돼 있다. 영결식 참석인원, 유해 운구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고, 주홍콩 총영사관에 설치된 빈소에 홍콩 교포가 조의(弔意) 용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 1개를 보내 와 이를 돌려준 경위도 나와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시 외무부는 해외 공관에 보낸 공문에서 "일부 해외언론이 이번 사건을 민청학련 등과 연관시켜 왜곡 보도하는 경향이 있으니 유의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함께 공개된 ‘재사할린 동포 귀환 교섭’ 문서에는 일제시대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동포들의 귀환을 추진했으나, 구 소련의 거부로 무산된 경위가 나와 있다.

특히 소련과 교섭했던 일본 외무성 관리는 "귀환 무산에는 북한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 구호’ 문서에는 정부가 원폭 피해자 치료를 전담하는 병원을 전북 정읍 등 3곳에 설치하고 관련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내려다 무산된 과정이 정리돼 있다. 정부는 일반 무상원조가 아닌 방식으로 협조를 요청했음에도 일본은 예산문제를 들어 서울공대 원조사업 후 실시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서승·서준식 간첩사건'도 공개/국내 유학온 日동포형제 고문의혹 제기되며 논란

‘재일본 한국인 서승(사진) 서준식 형제 간첩사건’은 서울대 유학 중이던 두 사람이 1971년 3월 간첩혐의로 보안사에 체포된 사건이다. 보안사는 당시 "선거시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 전복을 꾀하려 한 서씨 형제와 재일교포 출신 대학생 등 간첩 10명과 관련자 41명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25세였던 서승씨는 1968년 서울대에 입학한 뒤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던 중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90년 2월 가석방됐고,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었던 동생 준식씨(당시 22세)는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형을 선고 받아 88년 5월까지 복역했다. 서승씨는 보안사 심문과정 중 고문을 견디다 못해 분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후 고문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20일 공개된 19쪽 분량의 외교문서에는 고문의혹을 제기한 일본 언론의 보도에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한 상황이 기록돼 있다.

한편 98년 4월부터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 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서승씨는 이날 전화 인터뷰에서 공개된 문서에 대해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고문사실을 한국 정부가 부인했던 경위가 다시 확인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경위와 고문에 대해서는 나와 동생의 수기와 옥중서한에 모두 밝혀놓았다"며 다시 돌이키고픈 생각이 없음을 내비쳤다.

서씨는 "때로 사실을 은폐하는 구실로 이용되는 외교의 속성이 이번 문서 공개로 확인됐다"며 "문서 공개를 외면해 과거사 책임문제에서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의심을 받아도 어쩌지 못하는 일본 정부의 퇴행적 태도에 비하면 한국 정부의 이니셔티브가 훨씬 돋보인다"고 지적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정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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