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죽삐죽 하늘로 솟은 공장 굴뚝, 해 떨어지면 젊은 공원(工員)들의 혈기로 왁자했던 선술집들. 옛 구로공단과 남부순환도로가 교차하는 서울 구로구 ‘공단 오거리’의 옛모습이다. 1970~80년대 산업화시기 도시 외곽의 전형적인 공장지대였던 이 공단 오거리가 몰라볼 정도로 변신중이다. 한두 블록을 사이에 두고 첨단 벤처타운, 조선족과 영세민들의 집단거주지, 패션 아울렛타운이 형성돼 공단 오거리는 삼색(三色)으로 분화하고 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은 공단 오거리 남쪽의 ‘서울 디지털 1단지’ 지역이다. 여의도 금융가나 테헤란밸리를 연상시키는 20여 개의 초고층 오피스텔과 아파트형 공장, 소프트웨어 통신장비 애니메이션 분야 1,500여 개의 첨단업체들이 입주해있다.
이들 초고층 건물군에서 가발공장, 피혁공장, 인쇄소, 모발공장들이 모여있던 옛 구로1공단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구로공단 시절 전성기를 구가했던 공단 오거리의 유흥가는 인접한 전철역인 구로디지털단지역(옛 구로공단역) 쪽으로 이동중이다. 이곳 벤처기업 직원들은 퇴근시간이면 공단 오거리의 술집 대신 역 근처에 새로 들어선 패밀리레스토랑이나 커피전문점으로 몰려간다.
한신IT타워 이재순(43) 관리소장은 "디지털 1단지 지역은 남구로역 가리봉역 대림역 등 교통망이 편리한데다 건물 임대료는 강남의 절반 수준"이라며 "2010년께까지는 8,000여개의 업체가 들어서 테헤란밸리를 능가하는 국내 최대의 첨단산업단지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단 오거리에서 지하철7호선 남구로역까지 500c 가량 이어지는 가리봉시장 골목에는 또 판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중국음식점, 중국노래방, 중국술과 중국차를 파는 식료품점 등 50여개의 업소가 모인 ‘조선족 타운’이다.
동북삼성반점, 옌볜구육관(狗肉館·보신탕집), 홍루몽노래방 등 간판의 숲을 지나다 보면 마치 중국 옌볜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이 조선족 타운을 중심으로 한 가리봉1동에는 아직까지 속칭 ‘벌집’들이 400~500곳이나 남아있다. 1.5~2.5평에 월세 15만~20만원의 단칸방들. 구로공단이 들어서던 무렵인 68년 이곳으로 이사와 지금도 30여개의 벌집을 운영하고 있는 라보순(58·여)씨는 이 거리의 산 증인이다.
라씨는 "경기가 좋던 70~80년대에는 6만명이 넘는 공원들이 한꺼번에 공단에서 쏟아져나와 한 방에 3,4명씩 새우잠을 자곤 했다"고 회상했다. 라씨는 "5년 후에는 외국인 사업가들을 위한 호텔과 컨벤션센터를 세운다니, 이 지역은 아무래도 ‘떠돌이를 불러모으는 기운’이 있긴 있는 모양"이라며 씁쓸히 웃었다.
가리봉역 쪽으로 향하는 공단 오거리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 공단로를 따라 길가에 공장처럼 보이는 창고형 건물이 밀집해있다. 물류창고가 아닌가 싶은데 사실은 50여개 매장에 300여개의 브랜드가 입점한 대규모 패션 아울렛타운이다.
매장에서 만난 회사원 오준혁(32·경기 안양시)씨는 "이곳에 와서 주말쇼핑을 즐기는 것이 한 주일의 즐거움"이라며 "인접한 시흥, 광명은 물론 안양과 수원에서까지 이곳으로 쇼핑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산업화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변하는 세월만큼이나 곡절많은 사연들이 아로새겨진 공단 오거리. 이 거리는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