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공개된 한일협정 외교문서 1,200여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며 기자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정부가 일제시대 징병·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을 포기하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경제협력자금을 받았다는 정황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일제 35년 식민지배와 징병·징용 피해자에 대한 우리정부의 사죄 요구나 일본측의 사과는 공개된 문서의 구석구석까지 눈 씻고 찾아봐도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오히려 일본측 관계자들은 "우리가 정치적 협력 의미에서 자금을 주는 것"이라고 비꼬았고 정부 관계자들은 제대로 반박도 못한 채 돈을 받기 위해 급급한 모습이었다. 한 전문가는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문서로 확인하니 정부가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변명할지도 모르겠다. 그 때 일본과 협상을 타결해 자금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이 만큼 먹고 살 수 있었겠느냐고. 포항의 제철소나, 북한강의 수력발전소를 어떤 돈으로 세웠는지 아느냐고. 이번에 공개는 안됐지만 정부 협상단도 내부적으로는 강력하게 사과를 요구했노라고.
그러나 목적과 결과가 좋았다고 면죄부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편법으로 처리한 협상이 수 십년 뒤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정부에는 생채기를 남겼고 허탈한 국민들의 가슴에는 대못 하나가 더 박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부가 하는 일 중에 정권의 정치적 이익 때문에 편법으로 슬그머니 넘어가는 사안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잠시 잘못을 덮고 넘어갈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역사는 결국 진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역사적 과제를 다루는 외교안보라인 관계자들과 위정자들이 이번 문서 공개를 보면서 새삼 되새겨야 할 교훈일 것이다.
정상원 정치부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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