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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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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입력
200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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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법률가가 아니라 지역 주민이 재판에 참여해 사건의 결론을 내리는 배심재판제도는 민주주의적 이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제도로 흔히 소개된다. 이러한 이해는 학술적, 역사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원래의 배심원들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에 유사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이 제도는 분쟁의 자초지종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 사건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로 채택된 것이었다.

더욱이 배심제도가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은 순전한 오해에 불과하다. 마그나 카르타에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의한 재판(judicium parium suorum)’을 보장한다는 취지의 언급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봉건지주계급이 옛날부터, 시쳇말로 ‘관습헌법’상 누려왔던 봉건적 재판권을 보장 받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재확인 받기 위하여 제기한 다분히 수구적 요구였다. 배심원 제도는 마그나 카르타보다 훨씬 이전에 채택됐고, 국왕과 귀족 계급간의 정치적 타협을 담고 있는 마그나 카르타와는 전혀 무관하게 계속돼 왔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적 정치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사법제도 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직업법관에 의해 이뤄지는 우리의 재판이 민주주의적 이상을 표현한다고 믿는 이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법부의 재판을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는 더더욱 드물 것이다. 우리의 직업법관들이 대혁명을 앞둔 18세기 프랑스에서처럼 대중의 눈에 ‘법복귀족(noblesse de robe)’으로 각인돼 기득권 수호세력으로 지탄받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나 직업법관들이 국민의 진정한 대표자로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고 정치적 쟁점에 대한 결단을 내리거나, 정치적 프로세스를 좌지우지하여야 한다고 믿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는 삼권분립의 이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내려지는 일련의 선거법위반 사건의 판결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선거 과정이 현저히 왜곡될 정도로 뚜렷하고 심각한 범법행위가 자행돼 그 선거 자체를 아예 무효로 하기에 충분하고도 분명한 명분과 근거가 있다면, 사법부가 그러한 정치 프로세스에 개입하여 당선자의 의원직을 박탈하고 재선거를 하도록 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는 삼권분립의 이상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적 정치 질서를 확보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고무신과 막걸리가 넘쳐 나고, 적나라한 관권개입의 뚜렷한 증거가 있던 시절, 우리의 사법부는 어찌 보면 매정하리만치 정치 프로세스로부터 ‘초연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린을 방관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졸 학력의 후보자가 ‘감히’ 고졸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하기도 하고, 선관위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거칠게 항의하였다는 이유로 당선무효형을 선고하는가 하면, 심지어 거짓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의원자격을 박탈하는 판결을 하기도 한다. 이 판결들은 어쨌든 과감하고 적극적인 사법부의 정치참여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사법부가 이런 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현 정부가 ‘참여정부’임을 표방하고 있다 하더라도.

정직은 중요한 덕목이고 거짓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난의 방법과 정도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한다. 정치인의 부정직은 정치적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 수 있다. 정직하고 고매하신 직업법관이 협량한 사법적 기준에 따라 정치인의 부정직을 본격적으로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는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김기창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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