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는 수년, 길게는 10여년 동안 국내 출판계에는 불신의 골이 깊었습니다. 져야 할 짐은 많은데 출판계를 대표한다는 대한출판문화협회는 갈수록 힘이 빠지고 있습니다. 출판계의 통합과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내기 위한 행동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40년 가까이 뚝심 있게 인문학 책을 만들어온 김경희(67) 지식산업사 대표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비장하다. 18일 서울 인사동의 한 한식집에 기자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김 대표와 한철희(48) 돌베개 대표는 전날 ‘긴급기자회견’이란 표현을 써가며 안내장을 돌렸다. 20명 정도 모여 앉은 기자들 앞에 ‘2005년 한국출판인선언’이라는 성명서가 뿌려졌다.
"출판은 위대한 정신적 에너지이다." 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그대로 묻어나는 첫 문장에 이어 성명서는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 국내 출판계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있는지, 우리 출판계가 온당한 사회문화적 구실을 하기 위해 어떻게 환골탈태해야 하는지를 강도 높게 지적했다. "최근 출판계가 안고 있는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출판계는 처해 있는 시대적 과제와 안팎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에너지를 결집하여 국가사회의 미래지향적 정책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획기적인 대책을 한시 바삐 마련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해내는 작업을, 출판계 전체의 참여를 통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김경희 대표는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 2007년 유네스코 서울 책의 수도 행사, 2008년 국제출판협회(IPA) 총회 등 큰 국제행사들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라도 출협 중심으로 전체 출판계가 합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출협을 겨냥해 쏟아진 주문이 많았다. "출협은 강도 높은 자기개혁 작업에 나서야 한다. 새로운 리더십의 창출을 위해 현 집행부의 용단을 기대한다. 출협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비상대책회의 구성을 제안한다."
성명서 끝에는 이런 주장에 동의한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을 비롯해 양철우(교학사) 민영빈(시사영어사) 권병일(지학사) 김낙준(금성출판사) 안종만(박영사) 박맹호(민음사) 윤형두(범우사) 전병석(문예출판사) 이기웅(열화당) 김언호(한길사) 조근태(현암사) 윤석금(웅진닷컴) 조상호(나남출판) 고세현(창비) 이건복(동녘) 박은주(김영사) 강맑실(사계절) 등 주요 단행본 출판사 대표 42인의 이름이 올랐다.
특히 주목할 것은 2월 24일 3년 임기의 회장단 선거를 앞둔 출협에 ‘용단’을 촉구한 대목이다. 김 대표는 "자천 타천으로 차기 회장 후보가 물망에 오르고 있으나 酬풔報?통합이나 개혁 없이 구태를 반복해서는 안 될 일이다"고 말했다. 이번 주 안에 꾸려질 비상대책회의가 출협 등과 공감대를 만들지 못할 경우 집행부 불신임 등 극한 대립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취지는 좋으나 뜻대로 출판계 통합이나 출협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출판계가 사분오열되면서 불신만 더 커질 우려도 적지않다.
국내 출판계는 1947년 설립된 출협이 대표해왔으나 98년 유통업체 줄도산 등의 출판 현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단행본 출판사들이 한국출판인회의를 별도로 설립하면서 분열됐다. 한국출판인회의에는 현재 278개 출판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45%가 출협 회원. 이번 성명에 참여한 출판인들도 상당수 두 단체에 동시에 가입해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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