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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 사망/ 中, 반체제인사 경계 강화속 평온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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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 사망/ 中, 반체제인사 경계 강화속 평온 유지

입력
2005.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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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샤오핑 오른팔 …톈안먼 시위에 동조했다 실각…16년간 연금 ‘비운의 개혁가’

많은 중국인들은 아직도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1989년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확성기를 잡고 학생과 시민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16년 동안 그는 자택에 연금됐을 뿐 아니라 모든 공식기록에서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오 전 서기는 인민과 함께 세상을 바꿔보려 했던 비운의 개혁가로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국무원 총리로 선임되는 80년부터 그는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경제개혁과 개방적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두 사람 모두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왼팔과 오른팔 역할을 하는 개혁의 사도이자, 후계자 후보였다. 그러나 차례로 보수세력의 반격으로 실각하는 비운을 맞는다.

1919년 10월 허난(河南)성 화(滑)현의 지주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중퇴한 후 32년 공산주의청년단, 38년에는 공산당에 정식 입당하는 등 일찌감치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63년에는 44세 젊은 나이에 광둥(廣東)성 제1서기가 됐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타깃이 되며 67년 숙청되는 시련기를 맞았다. 와신상담한 그는 4년 만에 한직인 네이멍구(內夢古) 자치구 서기로 복권된 후 73년 공산당 제10기 중앙위원으로 당선되며 화려하게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75년에는 덩샤오핑의 고향인 쓰촨(四川)성 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돼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89년 5월 19일 수천명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톈안먼 광장에서는 "여러분의 충정을 이해한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6월 24일 권좌에서 축출된 그에게 가해진 죄명은 "당의 분열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실각 이후에도 여전히 ‘영원한 총서기’로 지식인 사회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98년에는 홍콩 인권단체가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골프에 한때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슬하에 4남 1녀를 뒀으나 말년에는 베이징(北京) 시내 중심 왕푸징(王府井) 부근의 푸창후퉁(富强胡同)의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dssong@hk.co.kr

■ 중국 정부·시민 반응

자오쯔양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숨진 17일 베이징은 어떤 동요도 이상 징후도 없는 일상적 분위기였다. 그러나 평온함 속에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사건과 자오쯔양에 대한 재평가 요구의 움직임도 묻혀있는 것 처럼 보인다.

자오쯔양 실각의 현장인 톈안먼 광장은 이날 데이트하는 연인들, 아이와 함께 연을 날리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광장 입구는 여느 때처럼 정복 차림의 공안 2명이 길 양쪽에 서 있을 뿐 시민을 통제하거나 검문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도자들의 사무실과 거주 공간인 중난하이(中南海)에도 별다른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자오쯔양의 죽음에 대한 감회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가 누구냐? 정치에 관심 없다"고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89년 실각 뒤 철저히 대중 활동이 차단된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 일뿐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의 죽음이 가져올 정치 사회적 파장을 적잖이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톈안먼 사건 당시 청년이었던 40~50대 장년층은 그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칭화(淸華)대의 한 교수는 "자오쯔양은 당시 차관급 이상 재산공개를 주장했고 부패한 자기 아들을 감옥에 넣으려 했다"며 "그는 우습고 억울하게 당했다"고 동정했다.

이 때문인지 베이징 푸창후퉁의 자오쯔양이 연금됐던 집이나 반체제 인사들의 집 주변에는 경비가 크게 강화됐다. 외신들은 빈소에 번호판을 가린 고급 승용차들이 드나들고 있다고 전했다.

언론들은 신화통신이 보도한 ‘자오쯔양 동지 사망(趙紫陽 同志 逝世)’제목의 한 줄짜리 기사만 전제하고 있다. CC-TV 정오뉴스 등 방송 매체에선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는 사망설이 보도되고 있으나 감시의 눈길이 번득이고 있다. 대표적 사이트인 신랑왕(新浪網·Sina.com)은 아예 글을 올리지 못하도록 했다.

중국 학계는 그의 죽음이 가져올 파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천이쯔(陳一諮) 전 중국경제개혁연구소 소장, 옌자지(嚴家其)전 중국사회과학원 정치연구소장 등은 자오쯔양의 재평가를 주장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 中, 사망할때까지 병세 감춰

중국 당국은 사망 발표 때까지 자오쯔양에 대한 ‘봉인’을 풀지 않았다. 11일 위독설이 처음 보도된 직후 쿵취안(孔泉) 외교부 대변인은 ‘고령으로 병을 앓았으나 치료를 받은 뒤 매우 안정된 상태’라고 부인했다. 그나마 외신기자들을 위한 브리핑이었고, 국내 매체는 자오쯔양의 병세를 무시했다.

14일께 딸 왕옌난(王雁南)을 통해 자오쯔양이 사경을 헤매고 있음이 분명해 졌지만 중국 언론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16일에야 신화통신이 ‘지병이 재발했지만 신중한 치료 끝에 상태가 안정됐다’고 보도했지만 역시 짤막한 외신용 영문 기사일 뿐이었다. 이때는 이미 유가족이 병실에 모이고, 홍콩의 밍바오(明報) 등 외신 기자들이 병실 불빛이 추도를 의미하는 흰색으로 바뀌기만 기다리던 때였다. 중국 국민들만 병세를 까맣게 몰랐던 셈이다.

더욱이 중국 당국은 한 번에 자오쯔양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꺼린 듯 국내 방송은 물론 외국 위성방송까지 끊어버렸다. 신화통신은 17일 ‘라디오와 TV는 사망보도를 쓰지 말라’는 주의문을 붙였고, CNN과 NHK월드프리미엄 위성방송도 자오쯔양 사망 뉴스를 전하는 순간 10~15분씩 방송이 차단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국 당국이 사망설을 미리 흘려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외신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국내에 들어온 사망설이 예방주사 역할을 하길 기대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11일 사망설을 첫 보도한 홍콩의 둥팡르바오(東方日報)와 타이양바오(太陽報)는 출자자 일부가 중국 고위 관리라는 얘기도 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 톈안먼 주역들 지금은

톈안먼 사건이 발생한 뒤 15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진압의 주역들은 모두 사망하거나 은퇴해 무대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반면 시위의 주역 가운데 상당수는 서방에 유학, 전문직종에 종사하며 돌아올 베이징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사건 직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내놓고 평당원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 1997년 2월 사망했다. 강경 진압을 주장한 리펑(李鵬) 전 총리는 지난해 3월 전인대 상무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은퇴했다.

군부를 움직인 양상쿤(楊尙昆)은 98년 사망했고, 동생 양바이빙(楊白永)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과 당 중앙군사위 위원 등 군부 요직을 차지하며 군내 최대 실력자로 떠올랐으나 93년 이후 당 중앙정치국원 자리만 유지한 채 한직으로 밀려났다.

수배령이 내려진 21명의 학생 지도자 중 11명은 서방으로 망명했고, 중국에 남아 있는 인사들 중 대부분은 샐러리맨이며, 3명은 행방이 불명확하다. 수배리스트 1호였던 왕단(王丹)은 검거 후 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총 7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 미국으로 추방됐다. 열정적인 연설로 유명했던 ‘총사령관’ 차이링(柴玲)은 미국으로 망명,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MBA)를 취득한 뒤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부총사령관’으로 불렸던 리루(李祿)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수학한 후 뉴욕에서 ‘히말라야 캐피털’이란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 톈안먼 사건 평가 변하나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그가 명예회복 될지, 나아가 중국 지도부의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사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지 여부다. 결론적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그 같은 조치는 현실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중국에서 톈안먼 사건의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늘고 있다.

서방의 평가는 1989년 당시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덩샤오핑(鄧小平)이 78년 개혁·개방정책을 표방한 이후 경제적으로 진전을 이뤘지만 정치적으로는 1당독재에 의한 사회통제가 계속돼 국민이 분출시킨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다. 당시 덩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 자오쯔양 등 개혁 전도사 3인방이 추진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개혁·개방으로 중국 경제는 일찍이 맛보지 못한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높아진 경제적 민도는 정치체제의 후진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한 국민의 불만이 후 총서기의 해임과 사망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정치자유화로 붕괴된 구 소련의 전철을 밟을 것을 두려워 한 중국 지도부는 지식인과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억압했다. 이 와중에 경제처방에 대한 중앙-지방 정부간 대립, 빈부격차, 도농 간 개발 불균형, 부정부패 등 부조리의 골도 깊어만 갔다. 서방 언론들은 톈안먼 사건을 "의식이 손발을 따라가지 못해 초래된 비극"이라면서 "언젠가는 중국 정치민주화의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반면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반혁명 폭동’이란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도 "지도층이 정부전복을 기도한 부르주아식 자유주의의 확산을 차단하는 데 실패했다"며 "따라서 군을 동원한 당의 무력진압은 적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정점으로 한 4세대 지도부가 등장하면서 미묘한 변화도 엿보인다. 톈안먼 무력진압을 계기로 집권한 장쩌민(江澤民) 등 3세대 지도자들에게 사건의 재평가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후 주석 등은 이 같은 역사적 업보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판공청 주임으로 자오 총서기를 수행해 톈안먼 광장으로 시위 학생을 직접 찾아갔던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가 ‘4세대 3인방’의 위치를 굳히고 있는 것도 달라진 인적구성의 단면이다.

지난해 6월 톈안먼 사건 15주년 기념식에서는 류젠차오(劉建超) 외교부 대변인이 ‘반혁명 폭란’이라는 기존의 용어 대신 "春夏之交的一場政治風波(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발생한 정치풍파)"라는 표현을 구사해 눈길을 끌었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 톈안먼 사건

1989년 6월 3일 밤 10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을 뒤덮은 100만명의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한 무력 진압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당시 중국정부는 300여 명, 외신은 1,500~2,000명의 시민과 학생이 무력 진압에 의해 숨졌다고 발표했다. 처참한 ‘피의 일요일’로 만든 이 사건이 바로 ‘6·4 톈안먼 사건’이다.

시위는 4월 15일 후야오방 전 당총서기의 사망이 발단이었다. 젊은 학생들은 급진개혁론자였던 그가 보수파 원로들에 의해 축출된 후 쓸쓸히 숨지자 불같이 일어났다.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점점 불어났다. 5월 15일 베이징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 일행마저 창안(長安)가 뒷길로 돌아가게 만들 정도였다.

5월 20일 리펑(李鵬) 중국 총리는 결국 베이징 일대에 계엄을 선포한다. 하지만 시위대가 ‘부패타도’와 ‘정치개혁’을 부르짖고 톈안먼 광장에 높이 9m의 ‘민주의 여신상’을 세우면서까지 저항하자 덩샤오핑은 이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발포 명령을 내리게 된다.

논란의 와중에서 자오쯔양은 시위대를 방문해 위로하는 등 동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결국 실각했고, 장쩌민 정권이 탄생했다. 이 과정은 2001년 미국에서 공표된 톈안먼 문서에 담겨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세계는 즉각 중국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박원기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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