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임채정 의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구원투수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위기나 갈등 국면에서는 그의 존재가 부각된다. 2001년 민주당 지지율이 바닥을 칠 때도 그는 당 발전특위 부위원장을 맡아 국민경선제 도입을 주도, 노무현 돌풍을 일으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우리당이 창당 13개월여 만에 지도부 총사퇴라는 위기를 맞은 지금, 그는 최상은 아니더라도 최적의 카드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는 피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연말 국가보안법 처리를 둘러싸고 불거진 당내 갈등을 치유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야파 좌장으로서 전당대회 경선에 출마해주기를 바라는 주변의 요청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었다.
임 의장은 가장 먼저 240시간 의원총회를 주도했던 이른바 강경파 의원들을 만났다. 그는 "당론에 근거해 원칙을 다소 강하게 주장한 것을 두고 강경파로 몰아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쪽을 가장 먼저 어루만진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당내 그룹들과 계속 만나겠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제왕적 총재의 강력한 리더십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의사소통과 여론수렴의 다양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임 의장은 실용과 개혁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설정해놓고 있다. ‘경제 올인’이라는 대통령의 국정 기조에 적극 호응하면서도 개혁을 결코 밀쳐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당의 모든 정책은 개혁의 완수라는 시대적 소명에 근거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개혁주의는 강경파, 실용주의는 온건파’라는 도식화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임 의장에게서는 가끔 노(老)정객의 운치도 드러난다. 그는 최근 집행위원회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를 인용했다. 여당은 많은 사람에게 뜨거운 존재가 돼야 한다는 취지의 언급이었다. 당시 참석자들은 아무도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임 의장의 뜻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당내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그는 "우리당에는 계파가 없다"고 강조하지만, 본인을 의장으로 추대한 것도 당권파와 재야파, 개혁당파, 친노직계 그룹 대표자들의 심야회동이었다. 또 이들 계파들이 원내대표 경선과 전당대회를 앞두고 제휴를 모색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2월 임시국회에서 국보법 파동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
그는 차기 국회의장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4선으로 국회의장을 하기에는 선수가 적다는 평가도 있다. 그래서 앞으로 3개월 동안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지금 임 의장은 당을 구하기 위한 구원투수이자 스스로의 역량을 보여줘야 하는 시험대 위에 서 있기도 하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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