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행여 시린 마음 달래려거든 새벽녘 겨울 호수로 가시라. 허름한 가슴은 희뿌연 물안개에 보듬어달라 하고, 상심일랑 정한 물속에 묻어두라.
동틀 무렵 여명을 받으며 강원 화천의 파로호를 찾아 나섰다. 화천의 엄동 추위에 차도 고뿔이 들었는지 시동 소리가 편하지 않다. 읍내를 감싼 화천강은 이미 꽁꽁 얼어붙어 물안개를 내뱉지도 못한다.
461번 지방도로로 달리는 길. 화천댐이 가까워지면서 아직 얼지 않은 강물이 소르르 물안개를 피워낸다. 수천개의 향불에서 피워낸 연기처럼 강물의 새벽 겨울 안개는 아련했다.
고개를 넘어 파로호에 이르니 길가 숲은 하얀 눈세상. 밤새 이곳에만 눈이 내렸나 둘러보니 눈꽃 중 최고로 치는 서리꽃, 상고대다. 서리꽃이 감싸고 있는 물안개 가득한 호수는 선경(仙境) 그 자체. 발소리에 놀라 꿈속 같은 풍경이 걷힐까 상고대에 취한 발걸음 다독이며 조심스레 호숫가로 다가갔다.
봄, 가을 호수의 물안개가 짙은 장막이라면 겨울 물안개는 살랑이는 비단이다. 분분이 피어 오르는 안개 속으로 물오리가 떼를 지어 유영한다. 수초는 서리꽃을 곱게 입었고 물과 맞닿은 곳엔 동그란 얼음이 얼어 크리스털처럼 반짝인다. 귀를 에는 추위, 습한 냉기가 목덜미를 파고 들어도 쉽게 떠날 수 없다.
거울 같은 호수는 새들의 이착륙으로만 잠시 일렁인다. 잔잔한 파로호를 깨우는 유일한 진동이다. 이 마저 없었다면 호수는 새들 발목을 옭아맨 채 얼어버렸을 것 같다.
저편 마을에서 닭 홰치는 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자 산 너머로 햇볕이 넘어오기 시작한다. 물안개가 마지막 춤을 격하게 덩실대기 시작했다. 반대편 산자락 볕을 받는 부분이 호숫가로 내려오며 서리꽃들이 발광(發光)한다.
지난 밤 드리워놓았던 그물을 거두러 어부들이 하나 둘 배를 타고 떠난다. 물안개는 배가 가른 물살에 넘실댔고 눈부신 아침햇살에 부서졌다.
해가 높이 솟구치자 안개는 안개처럼 힘을 잃고 결국 호숫물로 녹아 들어간다. 겨울 호숫가의 뻘건 흙살, 물빠진 자국이 드러났다. 마치 바리캉으로 깨끗이 다듬어놓은 듯, 물안개가 사라진 호수는 더 이상 감흥을 주진 못한다.
파로호는 일제가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며 1944년에 완공한 인공호수. 한국전쟁때 국군이 중공군 3만여명을 이곳에 수장시킨 전승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적을 사로잡아 대파했다’는 뜻의 파로호 이름을 내렸다. 북한강의 최상류로 가장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담은 청정 호수다.
파로호 아래 춘천호와 의암호도 물안개 풍경은 뒤지지 않는다. 호수와 호수를 잇는 호반길은 ‘천국의 드라이브길’이다. 물안개에 젖으며 이 길을 지난 이라면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다.
찾는 사람 드문 겨울이 호수는 가장 호젓하다. 그래도 더욱 혼자이고 싶고, 단둘이고 싶다면 덜 알려진 호수나 저수지를 찾아보자. 전북 임실의 옥정호나 충북 보은 속리산 자락의 삼가저수지, 전남 순천의 상사호 등도 새벽 경관이 수려하다. 물가로 드라이브길이 잘 조성돼 물위를 날며 안개 속의 낭만에 빠지기 제격이다.
화천=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겨울호수는 왜 얼지 않을까
한 겨울 모든 호수가 얼어붙지는 않는다. 호수가 결빙되기 위해서는 우선 호숫물 전체 온도가 4도까지 냉각돼야 한다. 일단 수온이 4도에 이르면 이 순간부터 더 냉각되는 물이 가벼워져 수면에 머물러 얼음이 되는 것. 파로호나 소양호처럼 수심이 깊은 호수는 냉각되는 속도가 늦고 호숫물 전체 수온이 4도까지 내려가기 전에 따뜻한 봄이 오기 때문에 결빙될 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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