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제일은행 직원들 사이에선 ‘내일을 준비하며’라는 제목의 비디오 테이프가 화제였다. 구조조정으로 문을 닫은 서울 테헤란로 지점 이상억 차장이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지점간판의 불을 끌 때까지의 하루를 담은 영상물로, 그해 초 명예퇴직한 2,300여명의 동료·선배들도 중간 중간 나와 "남은 사람들이 잘해 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회사에서, 집에서 이를 본 직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해 ‘눈물의 비디오’로 불렸다.
■ "긴 세월, 작은 기쁨도, 큰 슬픔도 함께 나눴을 수많은 동료와 부하직원을 떠나보낸 당신…, 오늘 아침에도 깨끗이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니 콧날이 시큰해집니다.…비록 테헤란로 지점의 불은 모든 제일 가족의 가슴에 아픔을 남기고 꺼져갔지만 앞으?더 크고 더 많은 점포의 불을 환히 밝힐 날이 꼭 올 거예요. 당신을 위해 언제나 곁에서 힘이 돼 드릴게요…." 같은 해 3월 초 ‘남편 기살리기’ 행사에 참석한 제일은행 간부부인 대표는 이 편지로 행사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 IMF 환란위기 전까지만 해도 ‘조상제한서’로 통칭되던 5개 시중은행(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 관치금융의 후유증으로 엄청난 부실을 안고 있었지만,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환란은 은행불패의 신화를 간단히 무너뜨렸고 이른바 ‘명퇴’라는 이름으로 수만명의 은행원을 거리로 내몰았다. 그 중에서도 해외매각 대상으로 지목된 제일은행의 경우 97년 말 8,000명에 가깝던 행원수가 99년 말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될 당시 4,800명 안팎으로 줄었고 폐쇄된 지점 수도 70개를 넘었다.
■ 그 후 5년여, 제일은행이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을 새 주인으로 맞아들였다. 나머지 4개 은행이 국내외 다른 은행에 인수합병되면서 본래 이름을 상실한 것과 달리 가장 먼저 된서리를 맞은 제일은행만이 명가의 전통을 지킨 것은 역설적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겪었던 정신적 물질적 고통 이상으로 국민경제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5조원을 넘는 공적자금 손실도 그렇지만 소매금융 위주의 안전운행이 세계적 표준처럼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3개 은행이 ‘순이익 1조원 클럽’에 가입했다는 뉴스도 반갑지만은 않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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