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근검 절약’이 ‘미덕’이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축률은 한국경제의 ‘압축 성장’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커지자 소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제 성장도 보장받기 힘들어졌습니다. 투자 재원을 국민 저축에 의존했던 대기업들도 ‘투자할 데가 없어 돈을 못쓰는’ 상황이 됐습니다. 국민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올해도 국민들 씀씀이가 풀릴 기미는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경기가 안 좋고 소비심리가 위축됐기 때문만은 아닌 듯 합니다. 과연 소비부진의 구조적 원인은 없는 걸까요. 소비는 언제쯤 회복 궤도에 올라서게 될까요.
◆ 소비부진의 이유
안 쓴다기 보다 못 쓴다는 게 더 정확합니다. 중산층은 담보대출 상환 부담에 발목이 잡혀 있고 저소득층은 빚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적자 구조에 빠져 있습니다. 가계부채 증가 속도는 둔화하고 있지만, 부채의 절대 규모는 여전히 가계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상회합니다.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고용불안도 지갑 열기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계약기간이 1년 미만인 임시·일용직이 전체 임금 근로자의 절반에 달하고, 우량 기업도 상시 구조조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세금 국민연금 건강보험 교육비 주거비 등 고정 지출도 계속 증가하고 있어 소득 총액이 늘어도 실제 사용가능한 소득은 넉넉치 못합니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가계소득에서 이런 고정 지출의 비중은 90년대 초반 15%대에서 2000년대 초반 20%, 작년 1·4분기에는 23.8%까지 상승했습니다. 연봉이 3,000만원이면 700만원이 자동으로 빠지는 셈이죠.
◆ 회복의 실마리는 부채조정
그렇다면 소비가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가계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부채가 축소돼야 합니다. 경제 규모가 확대되면 부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최소한 ‘갚을 수 있는 능력’(소득) 대비 적정 수준으로 재조정돼야 합니다.
전문가들은 최소한 내년 상반기까지는 부채 조정이 완료되기 힘들 거라는 분석입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의 총소득 개념인 명목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한 가계부채의 적정 수준은 54.9%(2001년 수준)~50.0%(2000~2001년 평균) 정도입니다. 가계부채가 급증하기 이전 수준 만큼은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과 같은 부채조정 속도를 감안하면 조정 완료까지는 1.8년(2006년 중반)~3.7년(2008년 중반)정도 걸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소한 내년 하반기는 돼야 2000년 이후 평균 소비 증가율인 4%대 중반에 도달 할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2001~2002년 비정상적으로 급등한 소비는 사실 미래의 소비를 끌어다 쓴 것이기 때문에, 소비부진은 불가피한 것이죠.
◆ 부채조정도 근원적 해결책 못돼
빚더미에서 벗어나면 예전의 소비수준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부정적 견해가 많습니다. 고용 불안과 고령화가 구조적 현상으로 자리잡은 이상, 소비에서 경제 복원력을 기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겁니다. 수명은 늘어나는데 언제 명예퇴직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미래소득의 감소라는 공포감으로 국민들을 엄습합니다. 그만큼 현재 소비의 기회비용이 커지는 것이죠. 그래서 처분가능 소득에서 소비성 지출이 차지하는 평균 소비성향 자체가 기조적으로 낮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는 개인의 몫’이라는 의식이 확산됐습니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4가구 중 1가구는 소득의 10% 이상을 노후 대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플라스틱 버블’로 불린 카드 사태는 국민들에게는 살아있는 경제교육이었습니다. 외환위기가 기업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꿨듯이, 가계 부채 위기는 가계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습니다. ‘리스크 관리’와 ‘건전한 재무구조’가 필수사항이 된겁니다. 결국 가계 부채조정이 완료되더라도 선진국과 같은 내수주도형 경제는 장기간 힘들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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