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만년 역사에 세계에서 알아주는 과학기술이 얼마나 있을까? 금속 활자, 측우기, 해시계 이외에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 DRAM 제조 기술, 디스플레이, CDMA, 휴대용 전화기 등은 최근에 인정 받는 기술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원천 기술은 우리 것이 아니다. 선진국에서 핵심 부품을 사오고 막대한 기술료도 지불하고 있다. 인간배아줄기세포 배양은 세계 최초로 이루어진 우리의 업적이라는 점에서 국부(國富)에 크게 기여하는 기술이 되기를 고대한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이듬해 과학기술처가 설립될 때까지는 우리는 과학기술의 암흑시대였다. 영국은 15세기에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을 설립, 이를 기반으로 17세기에 뉴튼과 같은 과학자를 배출하고 18세기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무려 500년에 이르는 과학기술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와 독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1900년까지는 대부분의 과학기술을 유럽에서 도입했으나 1850년대부터 명문 대학들을 설립, 유능한 교수를 유럽에서 유치해 우수과학기술 인력 양성에 힘써왔다. 이와 함께 기업체들이 기술발전을 주도,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 최강의 과학기술 국가가 됐다.
일본은 1853년에 시작한 명치유신 때부터 우수한 인력들이 유럽으로 건너 가 서방의 과학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1877년에 이공대가 포함된 동경대학이 설립됐으니 우리보다 최소한 100년 정도는 앞서 과학기술을 육성한 것이다. 일제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1916년에 설립한 것이 우리 과학 기술의 시작이었으나 이것도 사실은 우리 땅에 사는 일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백년에서 수백 년씩 앞선 선진국들의 과학기술을 개량과 창조적 모방으로 외형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따라잡는 기적이 1970년대부터 단 30년 만에 이뤄졌다. 정부, 경제인, 과학 기술자들이 신바람나게 뭉쳐 제 몫들을 해냈다. 60년 충주비료 공장 건설을 필두로 국가기간산업인 중화학공업이 육성됐고, 이공계 대학에 최우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성실하고 우수한 기능인들이 만든 우수제품 수출로 1인당 GNP 20,000불 시대를 눈앞에 둘 정도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토록 급하게 기술격차를 따라잡으려다 보니 얼마나 바빴겠는가? 67년부터 2004년까지 과기부 장관만도 23번이나 교체됐다. 2대 최형섭 장관이 7년 반 재임한 것을 제외하면 평균 재임기간이 1년 정도다.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고, 실천을 요구해 숱한 부작용도 생겨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도 가세, 무리하게 큰 변화를 시도해 과학기술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원천 과학기술과 이들의 산업화는 임기응변으로 되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3요소는 사람, 돈, 하부지원 구조이다. 원천과학기술 확보는 연구비만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창의적이고 우수한 인재들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또한 그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학교, 기업 및 연구소, 신뢰 받는 정부와 같은 튼튼한 지원구조를 필요로 한다. 장기적인 정책 수립과 지속적인 실천만이 우리의 과학기술로 세계 산업을 선도하는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행히 올해부터 참여정부도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하고 과학기술정책의 대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인위적인 혁신과 구호는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정말 변해야 하는 것은 사람, 기관 그리고 문화이다. 모두 오래 걸리는 일이다. 변화를 이끌 합리적인 정책을 세워 차근차근 실천해야 한다. 나무를 심어놓고 잘 자라는지 알기 위하여 뿌리를 뽑고 또 심어 끝내 나무를 죽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우성일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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