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타결된 쌀 협상 결과에 따라 농업과 농정 환경에 큰 변화가 오게 됐다. 무엇보다 올해부터 외국 쌀이 슈퍼마켓 등에서 시판된다. 2005년은 사실상 ‘쌀 시장 개방’ 원년인 셈이다. 서울대 경제학부 정영일 교수, 농업기반공사 안종운 사장,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문경식 의장이 7일 한국일보사 편집국에서 머리를 맞대고 기로에 선 한국 농업과 농촌의 활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진행=송태권 경제과학부장
_관세화(시장완전개방) 유예를 연장하는 대가로 의무수입물량을 두 배로 늘린 최근 쌀 협상 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
문 의장=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서 쌀 협상과 관련해 ‘선대책 후협상’을 제시했으나 결국 지키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모든 것을 밀실에서 진행했어요. 협상결과에 대한 대국민 설명도 토론회 한번과 기자회견 한번에 그쳐 국민과 농민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정부의 불투명한 행보에 대해 국회비준 과정에서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세계무역기구(WTO) 검증과정에서 수정할 것이 있으면 수정되도록 정부가 힘을 써야 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쌀 등 기초 식량은 교역에서 제외시키는 원칙을 관철시켜야 합니다.
정 교수= 농민과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年?게 사실입니다. 생산자인 농민은 시장 개방에 대해 엄청난 불안감을 갖고 있는 반면 소비자인 일반 국민은 완전히 무관심했어요. 농민과 국민의 합의가 있어야 했는데, 쌀 산업에 대한 비전과 구체적 대책이 제시되지 않은 채 협상이 이뤄진 것이죠. 국민적 합의 없이 관세화를 유예할 바에야 차라리 관세화가 유리했다는 생각입니다.
안 사장= 정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봅니다.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기적으로 관세화 유예가 긍정적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좀 더 토론이 이뤄졌어야 합니다. 정부가 농민 농민단체 등 이해관계자와 충분한 토론을 거쳤다면 관세화 전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_정부는 UR 이후 대대적인 경쟁력 강화대책에 나섰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정 교수=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처럼 지난 10년간 한국 농업은 제자리 걸음을 했습니다. 장기 전략에 입각해 체계적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선진국은 목표와 비전을 갖고 농정을 개혁했는데, 우리는 임기응변적 처방만 했습니다. 예컨대 일본은 매년 쌀값을 낮춰 개방 충격을 줄여간 반면, 우리는 해마다 추곡수매가를 높여 쌀 값이 UR 당시보다 두 배나 올랐어요.
안 사장= UR때 시장이 개방된 품목은 오히려 경쟁력이 높아졌습니다. 농가 스스로 선진국에서 기술을 배워오는 등 경쟁력 강화 노력을 한 것이죠. 채소의 경우 90년대 생산량이 100이라면 지금은 120~130로 늘었습니다. UR전에는 우리나라 농산물 수출이 전무했으나, 이제는 수출액이 상당합니다.
문 의장= UR 이후에 일부 품목에 한해 경쟁력이 생긴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은 오히려 더 못살게 됐습니다. 양극화가 가속화하면서 도태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확실한 대안 없이 경쟁력 강화책만 밀어붙여 대부분 농민이 소득은 줄고 부채는 늘어나는 절망적 상황이 되었습니다.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농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경쟁력 강화가 곧바로 농민에게 혜택으로 돌아가는 농정이 절실합니다.
안 사장= 생산자인 농민에게 고통이 따른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농민에 대한 소득보전 정책을 병행 추진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직불제 등이 필요했으나 예산당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죠.
_앞으로 농정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문 의장= 농민에게 희망을 주는 대책이 절실합니다. 그동안 농정은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대책을 내놓기 보다는 농민이 시위하면 우는 아이 떡 주는 식으로 미봉책을 거듭했습니다. 농민이 상경해 시위하니까 그 다음달 대책을 내놓는 식으로는 농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10년 앞을 내다보는 농정이 돼야 합니다. 정부가 내놓은 쌀 농가 소득보전 방안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농민 소득을 줄여나가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보다 확실한 소득보전 장치가 마련돼야 합니다.
정 교수= 쌀 생산과 소득지원을 분리해, 일정기간 농지로 보존되기만 한다면 농지에 무엇을 재배하든 일정 소득을 보전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쌀 값만 보장하니까 농민은 논에서 쌀만 재배합니다. 농업이 시장수요에 따라 움직이게 하려면, 정책도 탄력적으로 운용되어야 합니다. 소득보전 방안이 다양화하면 쌀 값도 시장수급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유럽연합의 경우 농업예산 중 농가 소득보전을 위한 직불제 비중을 내년까지 68%로 높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10%에 불과합니다.
안 사장= 확실한 소득보전대책이 농정의 대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난해 정부가 ‘농촌·농업종합대책’ 일환으로 내놓은 119조원 투자사업을 내실 있게 추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돈을 여하히 쓰느냐가 경쟁력 강화의 첫 관문입니다. UR 이후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고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과거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에는 정부가 예산을 배정해 지방에 내려주는 것이 효율적이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산 배정방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각 지자체가 특성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투자계획을 재점검해야 합니다.
_장기적인 관점에서 농정의 그랜드 디자인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정 교수= 국민들의 식생활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농정의 ‘먹거리 정책’도 원점에서 재검토돼야 합니다. 식품제조업, 외식업과 식품유통업까지 모두 ‘먹거리 정책’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영국이나 독일이 왜 농림부를 ‘농업식품부’로 개편했을까요. 영국 농림성은 농촌개발, 농산물 생산, 식품산업 등을 총괄하고 있으며, 독일도 식품정책과 농업 정책을 한데 묶었습니다. 우리의 현 농림부 체제는 국제기준으로 보면 절름발이입니다.
문 의장= 보건복지부, 환경부, 건설교통부, 행정자치부 등 각 부처별로 농업 지원사업을 별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업이 중복되고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안 사장= 농업후계경영인 육성 여부가 이른바 ‘지속가능한 농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정부정책을 다양화해야 합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패턴에 따른 구태의연한 농정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시장수요가 다양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정책 패키지가 마련돼 농민과 소비자가 자신의 여건과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정 교수= 무엇보다 농민에 대한 ‘사회적 보상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농정은 땅과 사람, 이 두 가지에 포인트를 맞추어야 합니다. 땅, 다시말해 농지정책은 특히 중요합니다. 농지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이용규제를 철저히 하고 불가피한 전용은 계획적으로 해야 합니다. 농지의 질서를 확립해야 합니다.
문 의장= 농촌, 농업, 농민이 생산자로서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공익적 기능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정부가 국민적 합의 도출에 앞장서야 하고, 언론도 농민시위를 사건적 시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심층적 분석으로 접근해 주기를 바랍니다.
정리=조철환기자chcho@hk.co.kr
사진=김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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