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월8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일제하 매판자본가 박흥식을 체포하면서 공식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는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세력이 저지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그 전해 9월22일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에 따라 10월12일 제헌국회 내에 설치된 특별 기구였다. 이어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와 특별검찰부는 각각 대법원장 김병로와 대검찰청장 권승렬이 그 전체를 관장했다.
박흥식은 반민법 제4조 7항의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이 법에 따른 최초의 구속자가 되었다. 평남 용강 출신의 박흥식은 유통업체 화신의 총수로 1930년대 말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와의 협력 아래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일왕(日王)을 만나 ‘대동아전쟁 완수에 건력을 바칠 것’을 맹세한 바 있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친일세력이 중추를 이루고 있던 경찰은 특위가 출범하자마자 백태민이라는 테러리스트를 고용해 특위 위원 가운데 일부의 암살을 기도했고, 박흥식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특별담화를 발표해 반민특위가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곧 이어 터진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한 반민특위는 6월 들어 국민계몽협회라는 반공단체의 연이은 항의 시위와 특위 산하 특경대에 대한 경찰의 습격으로 손발이 묶였다. 8월22일 반민특위 폐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무렵엔 특위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친일세력의 저항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존속 기간이 10개월에 불과했고 실제 활동 기간은 8개월도 못되었던 반민특위는 682건의 친일행위를 조사했지만 그 가운데 판결까지 간 것은 40건에 불과했고,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14명에 그쳤다. 더구나 이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40년에 대한 결산으로는 ‘쿨’하기 짝이 없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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