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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310> 아라곤의 캐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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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310> 아라곤의 캐서린

입력
2005.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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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1월7일 잉글랜드 왕 헨리8세의 첫 부인이었던 캐서린이 헌팅던의 킴볼튼성(城)에서 죽었다. 51세였다. 오늘의 주인공이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녀의 고향이 아라곤(스페인 북동부 지방에 있던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5세였고, 어머니는 카스티야(스페인 중부에 있던 왕국) 여왕 이사벨1세였다. 가톨릭 부부왕(los Reyes Catolicos)이라고 불렸던 이 부부는 두 나라 군대를 합쳐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스페인 통일의 바탕을 마련했다.

이 부부의 딸 캐서린은 잉글랜드 왕 헨리7세의 맏아들 아서와 결혼했지만 4개월만에 남편과 사별한 뒤 그 동생 헨리와 재혼했고, 남편이 헨리8세로 즉위하자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헨리8세와의 사이에 다섯 아이를 두었지만, 메리1세(메리 튜더)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캐서린은 남편에게 헌신적이었으나, 아들이 없는 것에 불만을 품은 헨리8세는 아내를 멀리하고 시녀 앤 불린에게 빠져 지내다 마침내 정식 이혼을 요구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 이혼을 허가하지 않았지만, 헨리8세는 두 해의 별거 끝에 1533년 마침내 이혼을 선언하고 앤 불린과 재혼했다.

헨리8세와 캐서린의 이혼은 영국 종교개혁의 물꼬를 텄다. 헨리8세가 제 이혼을 반대한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혼 이듬해인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해 잉글랜드 국교회(國敎會)를 만들고 스스로 그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것이 성공회(聖公會) 곧 영국교회의 시작이다. 한국에서도 만만치 않은 상징적 힘을 지니고 있는 성공회의 출발이 16세기의 한 이혼사건이라는 것은 이 종파의 독실한 신자들에겐 좀 멋쩍은 일일 것이다. 캐서린은 만년을 킴볼튼성에서 유폐돼 보내면서도 자신이 여전히 잉글랜드 왕비임을 주장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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