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세계적인 컴퓨터 바이러스 연구가 안토니 페트라스키는 전 세계 55종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놓고 성능을 평가했다. 1개월후 국내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 모임인 안티바이러스 리서치존(cafe.daum.net/avzone)을 통해 공개된 평가 결과는 업계를 술렁이게 했다. 국내 시장에서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고 있는 대표적인 국산 백신업체 H사와 A사의 제품이 각각 37위와 39위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 세계 시장의 반쪽 평가 = 평소 ‘한 수 아래’로 평가해왔던 중국 P사의 제품이 10위권에 올랐고, 국산 제품과 치열한 시장점유율 경쟁을 벌이고 있는 외국계 M사와 S사의 제품도 7~8위 자리를 차지했다. 예상 밖의 결과에 대해 "페트라스키가 평가기준으로 삼은 ‘진단 성공률’ 만으로는 실제 성능을 측정할 수 없다"는 불만?쏟아져 나왔다. 진단 성공률이란 PC에 감염된 컴퓨터 바이러스가 어떤 종류인지 가려내는 능력이다. 10위원 내의 제품들이 모두 93% 이상의 높은 성공률을 보인데 비해, 국내 제품들의 진단 성공률은 각각 45.68%와 42.33%였다. 명의(名醫)의 첫번째 조건이 병을 제대로 짚어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국내 백신 소프트웨어(SW)는 평범한 수준인 셈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국내 백신업체 T사 출신의 전문가는 "업체들이 오로지 ‘국내용 제품’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나라마다 풍토병이 있듯이 컴퓨터 바이러스도 국지적인 차이가 있는데, 국산 바이러스 백신은 주로 한국 환경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산 백신이 감염 치료율이나 편리한 기능 면에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국제적 환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출발하는 바람에 세계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평가에 올랐던 국내 업체들도 이를 인정했다. A사 관계자는 "보유하고 있는 바이러스 샘플(표본)의 수가 외국 업체에 비해 부족한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외국 업체들의 경우 정보화 후진국에나 찾아볼 수 있는 구형 도스(DOS) 바이러스를 비롯해 7만여개에 이르는 샘플을 보유하고 있다.
◆ 시장을 보는 ‘좁은 눈’부터 고쳐야 = 이처럼 기술 수준은 세계 일류지만 세계화(globalization) 측면에서는 걸음마 수준인 것이 한국 정보기술(IT) 산업의 현실이다. 게임, 포털, 이통통신 등 다른 IT산업의 해외진출 현황에 비해 SW산업은 더 뒤처져 있다. 실제 지난해 국내 SW산업의 해외 수출액은 4억7,000만 달러(콘텐츠 포함 5억9,000만 달러)로, 정보화 후발 국가라는 중국(20억 달러)의 4분의 1, 인도(30억 달러)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 국내 SW시장에서 외국산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83%에 이른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SW 직접 판매 방식이 확산되면서 국내외 시장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는 추세"라며 "국내 SW업체의 세계화 노력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국내 인터넷 산업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인정 받으면서도 여전히 ‘우물안 서비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명대학교 경영정보학과 김영문 교수는 "국내 인터넷 사이트 대부분이 한국어로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래서는 미국이나 중국 등 자국어 경쟁력이 높은 국가의 인터넷 산업에 밀리게 된다"고 우려했다.
실제 미국의 인터넷 순위 사이트 알렉사(www.alexa.com)의 세계 20대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2000년께는 항상 5~6개의 한국 사이트가 순위에 올랐다. 그러나 전 세계에 인터넷 붐이 확산되면서 국내 사이트들의 순위는 점점 밀리기 시작,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3개(다음 15위, 네이버 19위, 네이트닷컴 20위) 만이 ‘턱걸이’를 하고 있다. 반면 중국계 사이트는 2000년 0개에서 최근 7개로 급증했다.
세계화의 실패는 곧바로 우리 인터넷 산업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진다. 지난 8월 다음커뮤니케이션의 라이코스(www.lycos.com) 인수는 일부 해외에서 ‘새우가 고래를 먹은’ 사례로 소개됐다. 라이코스는 세계화에 앞서(42개국에서 서비스 중)있는 업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을 빼고는 서비스 수준에서는 다음 포털이 오히려 낫다는 것이 국내 업계의 얘기다. 국제적으로 ‘무명’의 설움을 실감한 셈이다.
한국 인터넷 사이트의 세계화를 가로막는 벽은 또 있다.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재일교포 조창효(25)씨는 "이름과 나이, 국적, 거주지, 이메일 주소면 가입이 가능한 외국 사이트에 비해 유독 한국 사이트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한다"며 재외교포라는 이유로 고국의 인터넷 사이트를 쓸 수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이 국내 인터넷 사이트의 현주소다.
◆ 세계화가 곧 경쟁력 = 현재 전 세계에서 18개 언어로 서비스 되고 있는 야후(www.yahoo.com)는 서비스의 세계화를 통해 경쟁력 유지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검색, 뉴스, 메일, 커뮤니티 등 각 서비스 별로 따지면 어느 하나 최고라 할 만한 것이 없지만, 발빠른 해외 진출로 전 세계인에게 ‘포털=야후’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덕분에 ‘무주공산’인 개도국 인터넷 시장에서 선점이익을 누리고 있으며, 덤으로 글로벌 브랜드 가치 구축에도 성공했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Business Week)가 지난해 7월 브랜드 컨설팅 전문기업 인터브랜드와 함께 조사해 발표한 세계 100대 브랜드 순위에 따르면 야후의 브랜드 가치는 46억 달러(5조원)로 인터넷 기업 중 최고인 61위를 차지했다. 야후는 경쟁이 치열한 한국 시장에서도 3~4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업계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야후코리아의 존재 자체가 한국 인터넷 업계의 당면 과제를 보여준다"며 "국내에 안주하는 인터넷 기업은 2~3년 내로 생존의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 해외 SW社의 세계화 전략
마이크로소프트(MS)는 1988년부터 윈도와 오피스 등 자사 주요 제품을 31개 국가의 언어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MS는 이를 위해 제품 기획 및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100여개 국가의 문화별 특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지사를 통해 ‘지역화’(Localization)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그 덕분에 윈도 한글판에는 한글과 한자 변환 기능이 포함돼 있고, 아랍어판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 기능이 추가돼 있다.
한국MS측은 "100여개의 문자 세트를 가지고 있는 기존 영문 윈도의 기술로는 1만1,172자(완성형 표기 기준)에 이르는 현대 한국어를 표현하기 힘들다"며 "이를 위해 별도의 한글 표현 기술을 개발해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업체인 미국 시만텍의 경우 미리 ‘국제 영문판’(International English) 제품을 만든 다음 이를 각국의 고유 언어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통해 20여개국을 대상으로 동시에 제품을 개발·공급하고 있다.
MS의 세계화 전략은 MS가 연간 390억 달러(43조원)의 수익을 거두는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SW) 기업으로 자리잡는 기틀이 됐다. 이는 독자적인 컴퓨터 SW산업을 지원·육성해온 국가에게는 치명타가 됐다. 일본의 경우 MS의 세계화 전략을 따라잡지 못해 결국 컴퓨터 운영체제(OS)와 같은 핵심적인 SW 개발은 포기한 채 게임 SW 개발에 치중해야 했다.
그러나 윈도 운영체제의 세계화로 국가간 기술 장벽이 사라지면서 세계 어느 나라의 업체든 일단 윈도 표준 기술에만 맞춰 제품을 개발하면 별다른 기술적 장벽 없이 전 세계에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로써 글로벌 PC 시장이 형성됐고, PC 산업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MS가 SW 독점 기업이라는 뭇매를 맞으면서도 세계 정보기술(IT) 산업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 받고 있는 배경도 그 때문이다.
정철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