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27일 공고된 개헌안은 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91.9% 참여, 91.5% 찬성’이란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국회 해산과 정치활동 금지, 비상계엄 등의 폭압이 국민 의식의 근저에까지 미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도, 너무 높은 찬성률이다. 국가나 개인이나 되도록 과거를 아름답게 보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일은 빨리 잊거나 최소한 스스로의 역할만이라도 부정하려고 한다. 이런 잠재의식만 아니라면 정권의 폭거로 시작된 ‘10월 유신’조차도 국민의 ‘양해’를 얻었다는 사실을 선뜻 부정하긴 어렵다.
■ 개헌안 국민투표에 앞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대대적인 대국민 홍보에 나섰다. 철부지들까지 ‘조국의 평화적 통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등의 구호를 뜻 모르고 외웠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10월 유신’과 ‘희망’을 짝짓는 글짓기 대회도 열렸다. 정치 구호와는 달리 ‘1,000불 소득, 100억불 수출’ 슬로건은 인상이 강했다. 아이들은 ‘머지않아 잘 먹고 잘 사는 날이 오는’ 꿈에 저마다의 무게를 실어 글짓기를 했다. 농촌과 도회지 달동네 어른들도 아이들의 소박한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 71년 1인당 국민소득이 290달러로 막 300달러 돌파를 눈앞에 둔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 3배가 넘는 1,000달러는 아득한 꿈이었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울 수 있었다. 숱한 정치·사회적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000불 소득’은 예상보다 빨리 왔고, 가속 질주로 훌쩍 1만달러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1만달러 소득도 특별한 국민적 감흥을 부르지 못했다. ‘IMF 사태’로 2003년에야 96년 수준을 회복한 데서 오는 속상함 때문만이 아니다. 커질수록 진실성이 떨어지는 숫자의 속성을 국민이 알아버렸다.
■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1만4,000달러를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달러화 평가절하가 주요인으로 이런 추세라면 올해 1만6,900달러, 이르면 2007년 2만달러를 넘을 전망이다. 그러나 외국 나갈 일이 좀처럼 없는 서민들에게 미국에서나 느낄 수 있는 구매력 증대는 무의미하다. 많은 나라에서 자국 통화로 표시한 경제지표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소득격차의 확대로, 산술평균인 1인당 국민소득의 의미 자체가 퇴색했다. 새해 벽두의 ‘2만달러 시대’ 합창에 감동이 없는 이유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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