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갔다 오니 아버지는 상도동의 집을 파셨다. 언덕배기의 120평 공간에 열 세 평 남짓한 집은 사실 누가 보아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뜰에는 온갖 나무들이 우거졌다. 봄이면 라일락 향기에 취했고, 여름이면 오동나무 잎사귀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마당에 텐트를 치고 누워서 자정 무렵에서 새벽이 올 때까지 일곱 개 별똥을 본 적도 있다. 언덕배기라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의 풍경은 참으로 고즈넉했다. 하나 둘 불을 밝히는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개들은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비둘기들은 모이를 찾아 굴뚝 근처를 배회하였다.
그러나 방마다 연탄불을 갈아야 했기에 집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재래식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집이 주는 정서적 풍요로움은 그 모든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물론 연탄불을 갈아야 했던 어머니에게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얼마 전 근처에 일이 있어 상도동 옛집 근처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오호, 옛집이 사라진 곳에는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기억은 한 존재의 뿌리다. 내 안에는 무수한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특정한 공간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과 공간에 채워진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치자꽃 향기에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고, 머루 한 알을 입에 넣으며 고향의 뒷동산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치자꽃 한 그루, 머루 한 알도 ‘나’를 구성하는 소중한 것임에 틀림 없다.
개발은 늘 ‘현대식 편리함’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새들과 별똥과 꽃향기가 사라진 뒤에 얻는 편리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새삼 옛집이 그리워진다. 그 집을 다시 찾는다면 어머니 일을 열심히 거들어드리리라.
김보일 배문고 교사·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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