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경제과학부 고재학 기자의 TV 끄기 체험담을 5회 연재합니다. 고 기자는 초등학교 4, 6학년 두 자녀를 둔 40대 아버지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TV를 접한 뒤 ‘밥 없이는 살아도 TV 없이는 못 산다’고 할 만큼 35년 간 TV를 옆에 끼고 살아 온 ‘TV 중독증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TV가 아이들의 장래를 망치고 가정의 화목을 앗아가는 흉기’라는 사실을 절감하고는 2년 전부터 TV 끄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에는 이웃과 친지 등 30가구를 대상으로 ‘TV 안보기 운동’을 벌여 TV 끄기가 가정의 잃어버린 행복을 되살리는 소중한 계기임을 확인했습니다.
"내게 TV 시청은 거의 유일한 취미다. 굳이 변명하자면, 기자생활이 불규칙하다보니 집에 들어가 TV 보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별로 없다. 만사가 귀찮고 피곤할 때는 그저 소파에 누워 TV를 본다. 밤 늦게 귀가한 날에도 습관적으로 TV 리모컨에 손이 간다. 옷을 벗고 씻는 동안에도 TV 소리만 들리면 왠지 편안하다. 군입거리 옆에 끼고 손으로 리모컨만 누르면 펼쳐지는 ‘별천지’를 아무런 생각 없이 보노라면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마음이 편하고 안정이 되는 느낌이다.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면 옷을 벗기가 무섭게 TV 앞으로 달려간다. 아빠가 TV를 켜면 엄마의 등쌀에 숙제를 하고 있던 아이들도 슬며시 TV 앞에 눌러 앉는다. ‘9시 뉴스만 봐야지’하고 TV를 켜지만, 스포츠뉴스와 미니시리즈, 시사프로그램을 거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이어지는 게 다반사다. 주말이면 본격적으로 TV에 매달린다. 미처 보지 못한 대하드라마와 코미디 프로그램 등을 보며 종일 즐겁게 빈둥거린다".
불과 2년 전까지 나의 모습이었다.
TV를 즐겨 보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엇비슷하다.
"퇴근 후 TV를 켜고 드라마나 쇼, 코미디 등의 프로그램을 보노라면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금세 잊어버립니다."(30대 공무원)
"종일 아이들과 씨름하고 남편 수발을 드는 입장에서는 아침 드라마와 홈쇼핑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에요."(40대 주부)
"돈도 없고 갈 데도 없잖아요. TV처럼 쉽게 즐길 수 있는 오락도구가 어디 있나요?"(10대 재수생)
TV 없이 살던 시절도 있었다. 불과 30~40년 전이다. 기자의 집 안방에 TV라는 신기한 물건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TV는 우리네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방과 후면 골목에서 숨바꼭질 다방구 매화틀놀이 등을 하며 뛰어 놀던 아이들이, 할머니에게서 처녀귀신 얘기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저녁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김치부침개와 찐 고구마도 식탁에서 멀어져 갔다. 대신 ‘황금박쥐’ ‘타이거마스크’ 따위의 일본 만화와 드라마가 안방을 점령했다. 탄산음료와 인스턴트식품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TV는 점차 세상의 중심이 됐다.
현대인은 틈만 나면 TV를 부둥켜안고 지낸다. 엄마는 불륜과 이혼, 신데렐라 탄생을 다룬 드라마에 빠져 현실의 고달픔을 달래고, 아빠는 대하드라마와 스포츠 시청이 유일한 낙이며, 청소년들은 선정적인 가요 프로그램과 폭력을 미화한 드라마에 혼을 빼앗긴다. TV는 지금도 채널을 마구 늘리고 화질을 높이며 더욱 자극적인 내용으로 안방을 공격하고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TV에 길들여져 ‘TV 없는 세상’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TV는 우리 여가생활의 대부분을 점령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TV를 끄고 나면 왠지 허전하고 불안하다고 말한다. 기자만 해도 밤 늦도록 TV를 본 날이면 잠이 잘 안 오고 숙면을 취하기가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몸이 가뿐하지 않았다. 오히려 TV를 끄면 이완됐던 긴장감이나 편안함이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도 TV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TV 안보기 운동’을 이끌고 있는 미국의 비영리단체 ‘TV 끄기 네트워크’는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행동들은 하기 힘들고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하지만, TV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런 습관이 돼버렸다"고 말한다. TV는 일종의 ‘중독’이요 ‘습관’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을 좀더 쉽게 설명해준다. ‘텔레비전을 버려라’의 저자 제리 맨더의 분석은 이렇다. "우리가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과잉자극에 도취해 있기 때문이다. TV는 10초에 한 번씩 인간의 주의력과 감각을 자극해 자연스런 정보리듬을 깨뜨리고 사고의 균형을 잃게 한다. 이를 통해 시청자는 조작된 영상을 직접경험으로 착각하고 획일적인 정보를 개인적인 체험으로 오해한다. 이런 과잉자극에 익숙해진 사람은 일상생활이 지루하다고 느끼고 그 욕구불만을 채우기 위해 다시 TV 앞에 앉는다."
인간의 뇌파에 대해 연구해 온 과학자들은 TV가 묘한 이완감과 편안함을 주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TV를 켜고 싶은 욕구가 생기며, 이런 경험은 약물에 중독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원래 계획했던 시간보다 더 지나서야 TV를 끄게 되고, 밥을 먹거나 집안일을 하면서도 TV를 켜놓은 채 지낸다는 것이다.
TV가 단순한 ‘바보상자’에 그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문제는 우리 자신과 자녀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가족관계를 단절시키며 헛된 환상과 과잉소비를 강요하는 ‘보는 마약’이라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느끼면서도 TV의 폐해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그건 무언가 잘못된 일이다. 이제 TV에 너무 익숙해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미필적 고의의 현장으로 가 보자.
■ 시간이 없어 책 못읽는다? TV시청 하루3시간 뭔가
마케팅조사 전문기관 리서치컴이 지난해 7월 전국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달에 평균 1.3권의 책을 읽는다. 10명 중 4명은 한 달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1993년에 우리 국민의 한 달 평균 독서량은 1.6권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책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책을 읽지 않는 것일까? 리서치컴 조사에 따르면 80%가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루 평균 3시간 이상을 TV 앞에서 보내면서도 ‘너무 바쁘고 피곤해 도저히 책 읽을 짬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이해를 할 수 있을까?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지난해 5~6월 전국의 소비자 6,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매체 이용행태 연구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의 평일 지상파 TV 시청시간은 평균 2시간 22분이었다.
토·일요일 시청시간은 더 길어 각각 3시간 11분과 3시간 42분으로 조사됐다. 케이블 TV 시청시간은 하루 평균 1시간 32분으로 지상파에 비해 50분 가량 적었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2000년 한국인의 주간 평균 TV 시청시간은 23.7시간(하루 3시간 23분)이었다. 휴일에는 평균 4시간을 TV 앞에서 소비했다. 선진국들은 주말 TV 시청률이 뚝 떨어지지만, 한국은 레저문화가 발달하지 않은데다 입시를 준비하는 자녀 때문에 주말에 집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상의 조사결과를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TV 시청시간은 최소 하루 평균 3시간 정도로 추정된다. 365일을 곱하면 연간 약 46일이다. 하루 8시간의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1년에 68일을 TV 앞에서 보내는 셈이다. 하루 8시간의 취침과 8시간의 노동, 출·퇴근과 식사시간 등을 감안하면, 현대인의 평일 여가시간은 4~5시간을 넘기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하루 TV 시청시간이 3시간이라면, 여가시간의 3분의 2 가량을 TV 앞에서 보내는 셈이다. TV 앞에서 연간 68일을 낭비하는 사람과, 그 시간을 독서와 자신의 삶과 가족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의 인생은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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