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혼율은 치솟고 출산율은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호주제 도입 여부를 놓고 가족의 해체냐, 아니냐 논란도 분분하다. 높은 교육열과 맞물린 기러기아빠의 증가는 ‘한국 가정의 도구화’가 낳은 폐단으로 사회문제화하고 있다.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제 남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남편이자 아버지, 가장으로서 한국 가정의 절대 권력자인 동시에 무한책임자였던 남성의 가족 내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강대에 출강하는 여성학자 정희진 박사와 청소년대안학교 ‘하자작업장 학교'에서 일하는 문화평론가 김종휘씨, 인터넷 여성사이트 ‘줌마넷’의 인기 필진이자 EBS TV 교육프로그램 ‘부모’의 고정패널인 소광숙씨가 한국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종휘 좀 아이러니하지만 저는 최근 욘사마 열풍에서 한국 남성의 위기를 엿봅니다. 일본의 욘사마 팬들은 젊은층이 아닌 50대 가정주부들입니다. 젊은 시절 산업역군인 남편을 대신해 가사와 육아, 노인 봉양까지 전담했지만 나이들어 보니 명문대 졸업시킨 자식도 떠나고 남편은 저 혼자 잘나서 산 줄 알고 자신한테 남은 게 없거든요. 뒤늦게 인생살이의 허망함을 느끼고 자아찾기에 나선 일본 여성들이 욘사마의 헌신적 남성상에서 위안을 얻는 거죠. 저는 한국가정도 남성들의 각성이 없는 한 이런 전철을 밟게 될 것 같아요. 벌써 황혼이혼이 늘잖아요.
소광숙 저같은 경우는 굉장히 보수적인 시댁 분위기 때문에 명절이나 가족모임이 있을 때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늘 둘째만 대학 보내면 끝이다, 헤어지자 그랬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술을 마시다 느닷없이 점을 보러가서는 ‘정말 아내랑 헤어지게 되느냐’고 물어봤다는 거예요. 말년에 이혼당할까 봐 내심 불안했던가 봐요.
정희진 황혼이혼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출산율도 사실은 가족문제에서 찾아야 해요. 여자들이 육아가 힘들어서 애를 안 낳는다고 하지만 저는 다르게 봐요. 여자들이 결혼을 안 하는 거예요. 요즘 초혼연령이 28세예요. 80, 90년대만 해도 노처녀로 불리던 나이죠. 왜 결혼을 안 하느냐, 이유는 간단해요. 여성은 활발하게 사회로 진출하고 있는데 남성들의 시각은 여전히 조선시대 가부장적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거든요. 여자가 일을 하면서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가정을 책임진다'는 전통적 남녀 역할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소 그런 면에서 저는 한국남자들이 좀 불쌍해요. 제가 전업주부로 살다가 사회활동을 시작한 지 이제 3년쯤 됐는데 통 적응을 못하거든요. 한번은 남편은 휴무일이었고 제가 일이 있어서 늦게 귀가하면서 설거지를 부탁했는데 안 했더군요. 화를 내도 남편은 무반응으로 소파에 누워있는 거예요. 막상 큰 딸아이가 "아빠, 이럴 거면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 졸업한 뒤에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나 하며 인생 끝낸다"고 화를 내니까 벌떡 일어나 하더라구요.
정 한국가정에선 딸과 아내의 지위가 현격하게 다르죠. 대부분의 남성들이 아내에겐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면서 자기 딸은 공부 잘해서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를 바라니까요. 아내도 누군가의 딸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는 거죠.
소 남자들은 ‘이젠 여자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 싫어해요.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기는 기분이라더군요. 제 생각엔 집안의 경제는 남편이 책임져야 한다는 뿌리 깊은 책임감이 있는 것 같아요.
김 그렇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의 시각은 많이 바뀌고 있어요. 결혼해도 맞벌이하자, 애는 나중에 낳자 등으로 변화하고 있거든요. 남성의 위기는 사실 여성의 사회진출에서 오는 게 아니죠. 여성이 공적인 영역으로 상당히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데 반해서 남성은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되는 가정내 역할에 무능한 게 문제죠. 공사를 넘나드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인데 남성은 가정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거든요.
정 부부싸움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아내에게 끊임없이 엄마를 바라는 거예요. 모성애를 요구하는 거죠. 이걸 여성학에서는 ‘보살핌의 위기’라고 불러요. 전통적으로 한국사회의 남성상은 의젓한 남성이 아니에요. 심하게 말하면 유아적 남성상이지요. 돈을 번다는 이름 아래 아내에게 엄마가 아기를 돌보듯 모든 가정문제를 다 보살펴주기를 원하는 거죠.
김 남성들은 사실 온전한 남자로 설 수 있는 교육을 못 받았어요. 아버지상이라는 것이 훈계하는 사람이었거든요. 독서지도만 해도 이 책이 이렇게 좋으니 읽으라고 설득하고 납득시키려고 해요. 관계의 핵심은 훈계가 아닌 유대감이라는 걸 모르는 거지요. 어느날 작전을 바꿔서 ‘네가 책 읽는 모습을 보니 아빠가 너무 행복해’라고 하면 아이들은 저절로 책을 읽어요. 사적인 친밀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죠.
정 저는 한국 남자들이 자아구성 능력이 떨어진다고 봐요. 집단정체성은 강한데 개인의 정체성은 떨어지거나 없어요. 회사에서 직함이 상무면 ‘상무=나’라고 생각해요. 집에서도 상무 대우를 받고자 해요.
김 남성들의 집단정체성 집착은 부메랑이 되어서 남성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어요. 경기가 계속 나빠지면서 극빈층과 중산층 가족의 해체가 거의 강제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부의 세습을 통해 안정적으로 가족기반을 유지할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상류층도 가족해체의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재미있는 예를 들까요. 제가 아는 대기업 이사 한 분이 명퇴를 신청하면서 가족들에게 ‘이젠 가족과 해외여행도 가면서 단란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더니 큰 딸이 ‘난 아빠의 퇴직에 반대다. 나는 백수가 아닌 대기업 중역인 아빠를 원한다’ 이러더래요. 결국 제도로서의 가족은 유지돼도 구성원 간의 친밀도라는 본성은 없어지는 거에요. 가족에게도 도구화한 아버지나 남편상으로만 남는 것이야말로 남성 위기, 나아가서는 가족 위기의 본질이지요.
김 저는 그 해결방안으로 부부중심의 가족문화를 찾으라고 권합니다. 자녀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일종의 ‘희생보험’을 드는 가족이 대다수입니다만 앞으로의 고령화사회에서 과연 부모가 들인 시간과 돈만큼을 되돌려줄 자식들이 있을까요? 그 시간에 부부만의 성과 쾌락에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는 것이 훨씬 행복한 노후를 가져다 줄 겁니다.
소 저는 가끔 남편에게 연애 좀 하라고 말해요. 바람 피우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남성이 직장에만 매몰돼있는 게 걱정스럽거든요. 온종일 직장에 있으면서 술자리도 직장동료나 회사업무에 관련된 사람들하고 해요. 그만큼 세상이 좁아지는 것 같아요. 차라리 연애라도 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 다른 감정을 듣고 보고 배우고 했으면 좋겠어요.
정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 가장의 외도는 가정을 유지하는 데 순기능적이라는 점을 알고 한 소리인 것 같은데요(웃음). 저는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기를 해방시킬 수 없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어요. 제가 한 건 아니고 유명한 사회운동가가 한 말이죠.
김 저는 남자들이, 40대 즈음의 남성이라면 특히 한번쯤 자서전을 써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나는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됐을까 해부해 보겠다는 작정으로 아들이자 남편이며 아버지인 자신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기 시작하면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이 열리죠.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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