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교양 작문’ 수업 당시, 담당 교수는 글쓰기 훈련의 일환으로 ‘노티싱(noticing)’이라는 작업을 고집했다. 주의, 주목, 관찰 등의 뜻을 갖는 단어의 진행형이니 주의를 집중하는, 주목하는 과정을 말했음이리라."나는 오늘 아침 신문에 한두 방울의 물 얼룩이 있음을 보았다", "나는 앞사람의 머리가 잿빛에 가까운 금발 인 것을 알았다"와 같이 학생들이 열거했던 노티싱의 결과란 소소한 ‘생활의 발견’ 들이었다. 교수가 의도했던 바는 쓸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평범한 일상속에 숨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 이후 노티싱은 내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습관이 되어버렸으며 무엇보다도 ‘음식’ 분야에서 제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 식 재료 노티싱
음식에 관한 노티싱은 사실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밥 한술 씹으면서 "나는 지금 현미와 콩을 섞은 밥을 먹는다" "햅쌀은 맛이 좋은 반면 중국산 콩은 설겅 설겅 입에 겉돈다"등 재료의 맛과 느낌을 스스로 음미하는 것이다. 혹자는 밥 한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를 숨가쁜 21세기에 한가한 소리한다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몸에 뭐가 들어오는지, 또 그에 따른 몸의 반응은 어떠한지를 꾸준히 노티싱 하는 것은 내 몸을 위한 최상의 처방전이다. 헬스클럽 회원권이나 보약 없이도 큰 병 없고 살찌지 않으니 이만큼 경제적인 웰빙의 방법도 없다. 새해엔 우리 모두 노티싱 식도락의 즐거움에 취해볼 일이다.
◆ 한식 노티싱의 즐거움
개인적으로 노티싱의 즐거움을 극대화해주는 것은 한식이라고 생각한다. 고추장과 케첩과 칠리 소스가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퓨전’ 요리나 올리브 기름인지 아보카도 기름인지 구분도 안가는 ‘양식’은 웬만한 전문가 아니고는 노티싱이 어렵다. 그러나 한식은 파,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등 낯익은 주인공들 일색으로 식 재료를 인지하며 먹기에는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하다.
재료의 귀함 여부에 따라 고급요리냐가 아니냐 갈리는 프랑스 요리와 달리 한국 음식에서는 ‘손길’을 최고의 프리미엄으로 쳐준다. 손이 더 갈수록, 세심한 준비가 많을수록 고급 요리로 불리 운다. 물론 전복이나 송이 버섯과 같은 ‘특 고급’ 재료를 써가면서 만드는 고급스런 맛도 있지만 대표적인 궁중 음식인 신선로나 구절판을 들여다보면 기실 비싼 식 재료보다는 하나 하나 손으로 썰고 지진 공임이 더 비싸게 값 매겨짐을 알게 된다. 공임은 많이 들되 식 재료의 맛은 살아있어야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요리사에게는 어려운 과제인가. 립스틱 하나도 자꾸 바르다 보면 본래 입술 색이 가려지게 마련인데, 수십 수백 번 조물락 거리는 손길의 끝에도 시금치는 시금치요 은행은 은행이어야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1mm로 채친 고명까지도 당근인지 달걀인지 명확한 한국음식은 혀끝 즐거움 그 자체다.
새 해 아침에 즐기는 콩 전&무나물밥 노티싱
콩전은 단백질 많은 콩으로 부친 전으로 절 집에서는 빈대떡 대신 먹는다. 소박한 전 한 조각이지만 곱게 간 콩 외에 숙주나물이나 고사리, 표고나 느타리버섯 등 잡채를 방불케 하는 많은 야채가 들어간다. 따로 볶아진 야채와 콩을 밀가루 한 큰 술과 소금간으로 치대어 한 스푼씩 지져내는데 완성된 전을 한입 베어 물면, ‘아, 내가 콩을 먹고 있구나’ 하는 노티싱이 절로 행해진다.
얇게 썰어낸 무와 약간의 고기를 넣어 밥을 짓는다. 고명으로 얹은 대추가 색을 준다. 새콤한 양념장에 살살 비벼먹으면 별미인데 역시, ‘내가 지금 무와 고기로 맛을 낸 쌀을 먹고 있구나’ 하는 노티싱이 쉬운 메뉴다.
한식 중에서 유난히 쉬워 보이는 두품을 소개한 이유는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선뜻 시도해봄직한 메뉴를 골랐기 때문이다.
같은 재료라도 손이 한번 더 가면 가치가 높아지는 수공예품 같은 우리 음식, 적당 적당한 소스의 뒤덮음 없이 오랜 준비와 디자인으로 지켜지는 식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으니 웰빙의 묘약이다. 대규모 미술관이 들어서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성황을 이룬다지만 정작 한국 수공예술인 한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곳들은 지금 서울에 많지 않다. 특급 호텔에서조차 한식 레스토랑은 하나둘 사라지는 마당이지만 새해 아침, 한식의 고상한 손맛과 재료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노티싱을 통해 새로운 한 해을 의미있게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푸드채널 '레드쿡 다이어리' 진행자
◆ 콩전
콩, 고사리, 당근, 숙주, 느타리버섯, 표고버섯을 한 줌 정도씩(약 70~100g), 소금, 식용유, 참기름 약간, 밀가루 1~2 큰 술
1햇콩이면 바로 다지거나 갈고 묵은 콩이나 중국산은 물에
불렸다가 살짝 데쳐서 다진다.
2고사리, 채친 당근,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숙주는 각각
식용유와 약간의 참기름에 살짝 볶아서 소금으로 밑간을 한다.
31, 2에 밀가루를 섞어서 질척한 반죽을 만들고 소금으로
간한다.
4팬에 식용유를 달구어 3을 한 큰술 씩 덜어서 지진다.
◆ 무나물밥
쌀 2컵, 무 150g, 다진 소고기 65g, 대추 7~9알, 물, 쪽파 약간, 간장, 배즙, 양파, 식초, 후추
1무는 1cm넓이로 얇게 썬다.
2씻은 쌀과 1의 무를 섞어서 밥솥에 깐다.
3자작하게 물을 붓는다.(무에서 수분이 많이 나오므로 물양은
평소보다 적게)
43위에 다진 소고기와 채 썬 대추를 올리고 밥은 짓는다.
5간장, 배즙, 양파, 식초, 후추를 섞은 양념장과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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