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출범해 우리나라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과제를 논의해 온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이하 사개위)가 27일 전체회의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년 2개월간 사개위 회의를 통해 합의된 사안들은 하나하나가 사법체계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것들이다. 내년부터 대통령 직속으로 후속 추진기구를 구성, 개혁 작업을 계속할 전망이다. 사개위 활동 426일간의 성과와 의미를 짚어 본다.사개위는 지난해 8월 대법관 인사를 둘러싼 사법파동을 계기로 태어났다. 사법제도도 시대 변화를 맞게 개혁하라는 여론 속에 청와대와 대법원이 합의, 법조·법학계뿐 아니라 국회와 교육·경제·노동·여성계, 시민단체 등 각계각층 전문가 21명이 모두 40차례에 걸쳐 머리를 맞댔다.
◆대법원, 중요사건만 심리
대법원은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사건만 심리하고 일반 사건은 5개 고등법원에 상고부를 설치해 3심을 맡는 방안이 다수의견으로 채택됐다. 12명의 대법관이 연간 1만 8,000여건의 사건홍수에 파묻혀 최고법원의 위상을 지키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고법 상고부의 판결이 엇갈릴 경우 대법원에 특별상고가 가능해 경우에 따라 ‘4심’도 가능하게 됐다.
한편 사개위 출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대법관 인사시스템 개혁은 일반인이 참여하는 ‘대법관제청자문기구’ 도입으로 갈음했다. 이 기구를 통해 올해 김영란 판사가 사상최초의 여성 대법관에 오르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법관 수를 대폭 늘려 인적구성을 더욱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008년 로스쿨 도입
미국식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2008년 문을 연다. 실무와 동떨어진 법학교육, 대학을 고시학원으로 전락시킨다는 현행 사법시험 제도의 폐해에 대한 비판이 배경이 됐다. 다양한 학부 전공을 이수한 학생이 3년(6학기) 과정을 마치면 80% 가량이 자격시험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얻는다. 수십년간 법조인 배출의 통로였던 사법시험은 2012년을 끝으로 폐지된다.
법조인 양성제도 개혁은 1995년 범정부적으로 구성된 ‘세계화추진위원회’ 때부터 숱한 논의를 거듭해왔으나 이해당사자들간의 반발로 10년 가까이 결론을 내지 못한 사안으로 이번 로스쿨 도입 합의는 사개위의 최대 성과로 꼽히고 있다.
◆일반인도 재판에 참여한다
판사가 아닌 일반인이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거나(미국식 배심제) 판사와 함께 재판부에 참여하는 제도(독일식 참심제)를 절충한 한국형 사법참여제가 2007년부터 시행된다. 일반 국민이 재판절차에 참여해 ‘법관의 전유물’이었던 재판의 민주적 정당성과 신뢰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갑작스런 변화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우선 2007년부터 5년간은 피고인이 동의하는 중죄 형사사건에 한해 일반인 5~9명이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와 형량에 대한 참고 의견을 재판부에 제시한다. 2010년께는 법조계와 학계, 시민단체 의견을 모아 우리 실정에 맞는 모델을 확정한 뒤 2012년부터 정착시킬 계획이다.
사개위는 8월 서울중앙지법 대법정에서 실제 재판을 방불케하는 배심, 참심제 형태의 모의재판을 시연했고 최종적으로 ‘배심·참심 혼합형’을 선택했다.
◆검사, 변호사도 판사된다
사법연수원 졸업시 판사직을 따낸 사람만 평생 판사를 하는 공식도 깨지게 됐다. 사개위는 내년부터 새로 임용되는 법관 중 5년 이상 경력의 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등 법조인의 비율을 높여나가 2012년에는 신임법관의 50%를 타직종 법조인 출신으로 채우는 ‘법조 일원화’에 합의했다. 사회에 대한 폭 넓은 이해와 다양한 경험이 보다 수준 높은 재판에 필수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결론이다.
◆형사사건 처리절차 대폭 개선
그 동안 우리 형사사법제도가 기본적 인권에 소홀했다는 지적에 따라 체포-구속-재판 등 각 단계마다 피의자와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개선안이 도출됐다.
형사사건을 중죄와 경죄로 나눠 가벼운 죄는 최대한 신속히 처리하게 하고, 긴급체포 요건 강화 등으로 인신구속의 요건은 더욱 까다롭게 했다. 지금까지의 서류중심 재판을 벗어나 법정에서 제시되는 진술과 증거로만 유·무죄를 판단하는 ‘공판중심주의’가 도입되고 군 검찰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일선 장성들의 지휘 아래 있던 군 검찰을 국방부 소속으로 통합하는 군사법제도 개선안도 제시됐다.
◆의미
사개위 안팎은 물론 법조계 전반에서도 세부내용에 대한 찬반을 떠나 "올해가 사법개혁의 원년이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하지만 안건에 비해 활동기간이 너무 짧아 일부 주제는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못했고, 다소 추상적인 결론에 만족하면서 후속기구로만 책임을 미뤘다는 지적도 있다.
사개위원으로 참여했던 대한변협 김갑배 법제이사는 "무위에 그친 종전의 사법개혁 시도와 달리 추진기구를 둬 현실화 방안까지 마련한 것은 진일보했다"며 "하지만 일부 충분한 논의가 부족했던 대목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내년 출범 사개추위는/ 향후 2년간 사개위 합의案 제도화
사개위 합의안은 앞으로 2년간 대통령 산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이하 사개추위)’에서 이어받아 제도화 한다.
내년 1월 출범하는 사개추위 관련 규정은 15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으로 공포됐다. 위원장은 대통령이 위촉하는 민간 인사와 국무총리가 공동으로 맡으며 부처간 원활한 협조를 위해 교육부총리, 법무·국방·행자·노동부 및 기획예산처 장관과 법제처장, 국무조정실장,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법원행정처장 등이 당연직으로 참여한다. 사개위 관계자는 "사법개혁 과제의 중요성을 감안, 국무회의에 버금가는 위원회가 꾸려졌다"고 설명했다. 사개추위 밑에는 각 부처 차관급으로 구성되는 실무위원회와 조사·연구 업무를 지원하는 추진기획단이 구성된다.
사개추위의 기능은 사법개?추진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과 관련 법령의 제·개정 등이다. 하지만 사안마다 당사자들의 이해와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 치열한 밀고당기기가 예상된다. 가장 뜨거운 논란이 예상되는 분야는 로스쿨이다. 도입에는 사개위가 어렵사리 합의했으나 학교 선정과 전체 정원, 인가 기준 등에서는 사개위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크게 갈렸다. 사개위는 로스쿨 전체 정원에 대해 현행 사법시험 합격 인원과 비슷한 1,200명 선을 다수의견으로 제시했으나 소수의견을 개진한 학계 등은 여전히 정원을 대폭 늘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인가 기준도 전임교수 규모와 실무형 교수 비율을 놓고 학계와 변호사업계가 대립하고 있다. 로스쿨 유치 여부를 대학의 사활 문제로 여기는 전국 대학들 간의 치열한 로비도 예상된다.
국민을 재판에 참여시키는 사법참여제도도 2007년부터 시행하기로 했지만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현행 법률체계와 용어 등을 국민에게 홍보하는 문제는 물론 예산 마련 등 현실적 장애가 많다.
대법원 기능과 구성도 여전히 쟁점이다. 사개위는 개선안으로 고법 상고부 설치를 다수의견으로 발표했으나 일부 시민단체와 학계에선 대법관 대폭 증원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고법 상고부가 처리할 것인지 정하는 작업도 사개추위의 몫이다.
김용식기자
■ "사법개혁 끝나지 않았다"
1년 2개월간 사개위를 이끌어 온 조준희(66·사진) 위원장은 29일 퇴임 기자회견을 갖고 "사개위는 종료됐지만 사법개혁은 끝나지 않았다"며 "후속 기구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계속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사개위의 결론이 과연 최상의 결정인 지에 대해선 아쉬움도 있다"면서 "하지만 어느 사안도 쉽게 결정된 것은 없었다"는 말로 논의 과정의 어려움을 내비쳤다. 조 위원장은 국내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초대 대표간사와 민주화보상심의위원장을 지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떤 안건이 가장 어려웠나.
대법원 개선 방안이었다. 로스쿨 도입 문제, 배심·참심제 도입도 쉽지 않았다. 쉽게 결정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로스쿨이나 배심·참심제는 사법체계를 고비용 구조로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사개위에서도 그 문제가 핵심 논점이었다. 로스쿨이 고비용 구조인 점은 맞다. 하지만 법학교육 황폐화 등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론이었다. 다만 사회 상류층만 법조인이 되는 구조가 되지 않도록 장학금 지원 등 후속대책이 필요하다. 배심·참심제도 공판중심주의 등 대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결정했다.
-사개위가 국민보다 법원 등 공급자 위주로 운영됐다는 비판이 있다.
사개위 합의가 지역 이기주의를 반영한 결과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수요자측 대표를 많이 받아들였고 늘 국민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활동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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