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여년간 국내 농어촌 구조 개선에 투자된 돈은 무려 82조원이다. 그 사이 우리 농가의 호당 부채 규모는 1992년 692만원에서 지난해 2,697만원으로 오히려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생산자 중심의 농어촌 구조 조정이 실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그렇다면 소비자 중심으로 시각을 바꿔보면 어떨까.26일 경기 파주시 군내면 통일촌. 철책이 둘러쳐진 통일대교를 뒤로 하고 오랜만에 찾아가본 통일촌은 과거와 달리 겨울인데도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곳 슬로푸드(slow food·전통 조리음식) 마을에서 멧돌을 돌려보고, 절구질에도 흥이 오른 아이들이 연신 떠들며 즐거워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들은 안내인의 설명을 꼼꼼히 메모하고 있고, 아이들은 앙증맞은 손을 놀리며 메주 쑤는 재미에 쏙 빠져있다.
1973년 이스라엘 정착촌 키브츠를 모델로 해 실향민 40가구 등 80여 가구를 이주시켜 민통선 내에 설치한 통일촌은 그동안 평범한 안보관광지에 머물러 있었다. 도라산 전망대와 제3땅굴을 둘러본 관광객들이 이 마을에 들러 점심을 먹고 기념품 몇 가지를 산 뒤 다시 떠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통일촌이 달라졌다. 이곳 ‘장단콩 마을’이 경기도에 의해 4월 슬로푸드 마을로 지정되면서 8개월만에 7,000여명의 관광객을 유치했다. 장단콩 마을에서 두부 두유를 만들어보고 감자 고구마도 캐보고, 도리깨질 멧돌질에 장작불도 때 본 아이들은 너무 즐거워했다. 소식은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유치원 학교 등 단체 관람객 2,000여명을 빼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로 거의가 가족 단위였다.
효과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것이었다. 지난 8개월간 관광객들이 이곳 마을식당에서 특산물 장단콩으로 만든 된장 청국장 순두부 등을 먹고 사 간 것이 모두 8억원어치. 지난해 슬로푸드 마을로 지정되기 전의 꼭 두 배 수준이다.
이 마을은 내년 군부대와 협의를 거쳐 하루 3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초가집을 지어 밤이면 가족들이 함께 누워 은하수를 볼 수 있게 해줄 계획이다. 조경도 새로 하고 소달구지도 마련해 체험마을의 분위기를 한층 돋울 생각이다. 숙박이 가능해진다면 3가구가 하루 2∼3끼를 더 먹는 셈이므로 콩 소비와 판매는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한 마디로 생산, 가공, 판매가 한번에 이뤄져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농가소득이 보장되는 셈이다.
장단콩 마을 이완배(52) 대표는 "매년 11월 열리는 장단콩 축제도 성공적이긴 하지만 1회용인 반면 슬로푸드 마을은 연중 콩 소비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면서 "이곳은 땅굴과 임진강, 도라산전망대 등 관광지를 끼고 있어 안보관광객 중 일부만 추가로 유치하더라도 수익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가 올해 독자적으로 조성한 슬로푸드 마을은 장단콩마을과 양평 보릿고개마을, 이천 부레미 우렁마을, 서해 일미마을 등 10곳이다. 마을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올해 이들 마을을 방문한 관광객은 지난해에 비해 12배가 늘었고 소득은 무려 26배나 증가했다. 경기도는 올해 가구당 560만원인 슬로푸드 마을의 가외소득이 2009년이면 1,000만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기도는 이들 마을을 상표등록하고 점차 프랜차이즈화 한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슬로푸드 마을을 기획한 정창섭 경기부지사는 "도시민들에게는 놀이와 건강을, 농민들에게는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 슬로푸드 마을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우리 농촌은 이제 그 안에 노령의 생산자만 있는 메마른 공간이 아니라, 도시에서 찾아오는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활기찬 공간으로 변신해야 한다. 경기도의 슬로푸드 마을은 그 ‘찾아오는 농촌’의 새로운 모델이다.
이범구기자 gogu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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