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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비원을 시민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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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비원을 시민 품으로

입력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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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원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몇 년 전 여름,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비원을 헤맸다. 창덕궁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이 허풍처럼 들릴 지 모르나, 어렴풋이 방향을 정하고 30분 가까이 걸어 겨우 돈화문에 이르렀다. 비원은 그렇게 깊고 호젓하고 신비한 숲이었다. 걷는 동안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소나무 참나무 등이 울창한 사이로 매미소리만 귀에 따가웠다.놀라웠다. 도심 궁궐에 이렇게 아름답고 품위 있는 숲길이 있다니…. 길을 잃지 않았다면, 평생 그 길을 걸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훌륭한 산책로가 있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미아처럼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나중에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니 마냥 흐믓했다. 즐거운 기억이지만, 몇 가닥 의문은 남아 있다. 그 산책로는 누구를 위한 공간이며, 왜 개방되지 않는가.

창덕궁은 경복궁에 이어 1405년에 세워졌다. 왕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좋아했다. 세종은 상림원에 하교했다. "내 천성이 화초를 좋아하지 아니한다. 뽕나무 닥나무 과실나무는 모두 일상생활에 요긴한 것이니, 이제부터 이것으로 직책을 삼음이 옳을 것이다." 금원(禁苑), 후원으로도 불리는 비원의 그윽한 숲은 세종 때 틀이 갖춰진 셈이다. 비원에는 기화요초보다 과실수를 더 사랑한 세종의 애민정신과 소박함이 숨쉬고 있다.

최근 문화재청이 두 궁궐의 입장료를 내년부터 인상할 계획이어서 국민이 놀라고 있다. 경복궁은 어른 1,000원을 3배인 3,000원으로 올리고, 무료였던 7세부터 고교생까지는 1,500원을 받는다. 이제 경복궁은 서민과 청소년에게 가기 어려운 곳이 된다. 국민의 문화 향수권과 복지를 확대해야 할 시기에 무슨 시대착오적 행정인가. 창덕궁 입장료도 700원이 올라 3,000원이 된다.

문화재청의 이런 독선과 횡포를 최근 ‘지평선’을 통해 지적했고, 이에 대한 경복궁관리소장의 반대 입장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나아가 창덕궁의 폐쇄적 운영문제까지 짚어보고 싶다. 60년대인 중고등학교 때는 창덕궁에 사생대회나 소풍을 가서 고궁의 향기 속에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곳에는 화가들이 아름다운 부용정 등을 그리고 있었고, 가을 국전에는 으레 그런 그림들이 출품되었다.

창덕궁은 1976년부터 3년 간 보수복원공사를 내세워 일반공개를 금지 시켰다. 재공개 하면서 개별 자유관람은 금지시키고,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여 단체관람만 허용했다. 갑자기 비싸진 관람료도 발길을 막았지만, 안내원을 따라서만 관람하게 되면서 점점 마음에서 멀어졌다. 획일적 관람은 피곤하다. 방해 받지 않고 제 취향대로 관람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현재 창덕궁은 연경당·선향재까지 가는 일반 관람코스와, 지난 5월 신설하여 옥류천까지 가는 특별 관람코스 등 두 갈래 길이 있다. 확대된 특별 코스라도 창덕궁 16만평 중 동쪽 5만평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전면 통제되는 진짜 비원이다. 운 좋게 길을 잃어 그 산책로를 걸었던 것이다.

경복궁 관람료를 하루 아침에 3배나 인상하는 것, 과거 3년씩이나 창덕궁 관람을 불허한 것, 비원을 전면 폐쇄하는 것 등은 군사정부에게나 어울리는 비문화적 행정이다. 내국의 서민은 외면한 채 고궁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도 허용해선 안 된다. 최소한의 여론수렴도 없는 행정편의주의와 귀족주의적 발상이 걱정된다.

문화재를 적극 보호하고 훼손을 막아야 하겠지만 신비화할 이유는 없다. 비원 관람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되 숲에 무리가 가면 휴식년을 선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너구리 족제비 외에는 아예 접근을 못하게 하는, 보존을 위한 보존에는 찬성할 수 없다. 혹시라도 문화재가 훼손되면 보수하면 된다. 민족의 유산으로부터 국민을 소외 시켜서는 안 된다. 경복궁 입장료는 인하하고 창덕궁 비원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 주기 바란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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