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홀로 집에’를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다면 이런 서사를 택하지 않을까. 동화 속 풍경 같은 영화의 무대를 북해 인근의 을씨년스러운 섬으로 바꾸고, 캐롤 대신 하드록이나 심란한 켈트음악쯤을 까는 식으로 몇 군데 손을 본다면? 다만 매컬리 컬킨의 앙증맞은 공포 연기를 차가운 악마 버전으로 소화해낼 만한 아역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또 만일 영화화하더라도, 열 여섯 살 주인공의 열 살 이전 시절의 이야기를 주된 서사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의위원들의 집요한 가위질과 격론을 거친 끝에 ‘18세관람가’로 개봉하게 될 것이다. 영국 작가 이안 뱅크스의 장편소설 ‘말벌공장’은, 읽는 것조차 가끔 불편할 만큼 하드보일드한 성장소설이며, 유년의 거세공포가 강박·편집증적 콤플렉스와 폭력성으로 발현하는, 프로이트적 메커니즘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본격 심리소설이다.
열 여섯 살의 ‘나’는 스코틀랜드 바닷가 작은 섬의 외딴 저택에서 몰락한 지주계급 출신인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아버지는 화학박사학위를 지닌 과학자이지만, 섬에 칩거한 채 방귀냄새로 섭생을 파악하는 원리 따위의 논문이나 쓰며 소일하는 인물이다. ‘나’는 네 살 무렵 개에게 물려 성기가 잘린 자폐성향의 성 불구자로, 섬을 요새로 삼아 가상의 적을 경계하며 산다. ‘강철구슬 돌 볼트 납 무게추 따위의 은닉 물자를 섬의 전략적 거점 여기저기에 체계적으로 묻어’ 두고 ‘올무나 유리병에 연결된 인계철선을 풀밭에 설치’하고 ‘면도날을 가장자리에 박아 넣은 플라스틱 원반 같은’ 비밀병기를 갖추고 있다. ‘나’는 다락방에 곤충들의 고문, 살충장치인 ‘말벌공장’을 만들어두고 희생물들의 운명 위에 신처럼 군림하면서 자기충족적인 그 세계를 통제 조율한다. 그리고 ‘나’는 여섯 여덟 아홉 살 때 사촌형과 친동생 사촌여동생을 차례로 살해한 살인자다.
소설은 동네 개들을 상습적으로 태워 죽이는 등의 ‘만행’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됐던 이복 형이 병원을 탈출해 섬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한때 든든한 동지이자 친구였던 형은 이제 ‘나’의 안정된 세계에 대한 잠재적 위협일 뿐이다. ‘나’는 전쟁준비에 돌입하고, 섬 순찰 등 경계의 고삐를 더욱 죈다. ‘나’에게 순찰은 곧 놀이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모래로 댐을 쌓고 마을을 조성했다가 그 댐을 폭파하거나, 말벌을 산 채로 밀랍에 가두거나, 새 두 마리의 다리를 서로 묶어놓고 싸우게 하는 식으로 ‘나’는 논다.
‘나’는 어린 혈육들을 살해한 현장을 지나치며 당시의 정황과 살해 동기 등을 회상하기도 한다. 이복 형의 토끼를 죽였다는 이유로 사촌형을 뱀에 물려 죽게 만들고, 자신의 성기를 물어뜯은 개를 아버지가 목졸라 죽이던 날 동생이 태어나자 그 동생을 개의 환생이라 여겨 폭사시키고, 두 명의 사내아이를 죽인데 대한 ‘통계적 호의’ 차원에서 사촌여동생을 연줄에 엮어 숨지게 한다. ‘나’는 모든 범행을 사고로 위장하고, 악마적 천진난만함으로 혐의와 책임추궁을 모면한다.
소설은 이복 형이 섬에 도착하고, ‘나’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종족으로서의 존속을 위한 모든 이유를, 그 가치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도둑맞은’ 자의 잠재적 복수심, 거세에 대한 보상심리로 추구해온 위대한 자로서의 존재감… 거기서 ‘말벌공장은 인생을 구축하려는 나의 시도였고… 내가 원하지 않았던 타자와의 교류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이코로 보이던 소설 속 ‘나’에게서 우리의 닮은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당혹스럽고 고통스럽다. ‘각자 공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우리는 우연히 어느 복도로 들어가서 자신의 운명이 확정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단 하나의 단어, 단 하나의 눈길, 단 하나의 말실수도 그 운명을 바꾸고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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