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2월22일 드뷔시의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 파리에서 초연됐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스테판 말라르메의 장편 상징시 ‘목신의 오후'(1876)의 음악적 번안이다. 드뷔시는 당초 말라르메의 시를 전주곡·간주곡·종곡(終曲)의 세 곡으로 풀어낼 생각이었으나, 전주곡만으로도 그 주제를 충분히 담아냈다고 판단해 작업을 더 진척시키지 않았다. 인상주의 음악의 걸작으로 꼽히는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통해 드뷔시는 유럽 음악계에서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드뷔시 관현악곡의 질료가 된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는 여름날 오후 들판에서 요정들을 좇는 목신(牧神) 판(Pan)의 관능적 몽상을 묘사하며 탐미주의를 실천한 근대 서정시의 백미(白眉)다. 초고는 ‘목신의 독백'이라는 제목 아래 무대 낭독용으로 쓰여졌으나, 코메디 프랑세즈로부터 공연을 거절당한 뒤 순수한 서정시로 손질됐다. ‘목신의 오후'는 1912년 역시 드뷔시 음악을 매개로 니진스키에 의해 발레로 안무되기도 했다.
말라르메에게 시적 영감을 불어넣은 덕에 문학·음악·발레 등 장르를 답파(踏破)하며 이름을 드날린 판(프랑스어로는 ‘폰: faune')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양(半人半羊)의 신이다. 로마신화의 파우누스(Faunus)에 해당한다. 판은 산과 들과 숲에 살면서 가축을 지키는 것이 그 역할인 터라 한자권에서 ‘목신(牧神)'으로 번역됐지만, 그 생김새 때문에 ‘반수신(半獸神)'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판은 말라르메 시에서도 묘사되듯 요정들의 아름다움을 탐했는데, 요정 에코와 시링크스는 그의 치근덕거림을 피하려고 각각 메아리와 갈대로 변했다. 시링크스를 놓치고 아쉬워하던 판은 갈대가 바람과 어울려내는 소리에 반해, 갈대줄기를 이어 붙여 피리를 만들었다. 이것이 팬파이프(판의 피리)의 신화적 유래다. 그래서 팬파이프를 시링크스라고도 부른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