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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주년 기획시리즈-우리시대 주인공] (23) 영화 ‘박하사탕’의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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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주년 기획시리즈-우리시대 주인공] (23) 영화 ‘박하사탕’의 김영호

입력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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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씨, 총을 사셨더군요.이리 저리 돌려 보고 머리에도 겨눠 보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군요. 총구를 입에 구겨 박을 때는 커다란 눈깔사탕 삼키는 아이처럼 천진한 눈빛이 빙그르 떠오르던데. 제 눈에만 느껴진 건가요. 그런데 그 총은 한번 써 보지도 않고 왜 열차가 달리는 철길 위로 올라간 건가요?

한명 고르기가 어려웠나요. 영호씨 인생 망친 사람들 중 한명, 딱 한명 골라서 같이 죽겠다더니요. 결국 혼자네요. 전 재산 날리게 한 증권회사 직원, 인생 더 꼬이게 한 사채업자, 사기 치고 도망간 동업자, 이혼한 마누라…. 다 용서한 건가요.

영호씨, 억울하세요? 당신 잘못은 없다고 생각하나 봐요.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면 영호씨 인생, 달라졌을까요. 영호씨, 너무 남 탓만 하는 거 아니에? ‘그렇게 하라고 시켰잖아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겁니까, 왜 나보고만 다 책임지라고 해요.’ 총 샀을 때는 이런 심정 아니었나요.

가구대리점 할 때만 해도 나빠 보이지는 않더군요. 사는 거 뭐 별 거 있나요. 돈 있으면 그럭저럭 견딜만한 게 인생이죠. 돈도 꽤 벌리고 집도 새로 마련하고, 그러면서도 전화기에 대고는 "아이구, 요새 장사 안되서 죽겠어" 엄살이라니. 능청이 몸에 배인 딱 장사꾼이던걸요. 아, 마누라가 바람 피운다구요. 광신도라구요. 기도만 시작하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눈물바람이라구요. 에이,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잘 살던데요.

영호씨, 돈 쓰고 좋은 차 타고 그 차에 애인 태우고 바람 피우며 평생 살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적당히 타락하고 적당히 행복해 하며 사는 거 아닌가요. 돈 좀 날렸으면 어때요. 왜 과욕은 부려서 증권은 증권이에요. 다 영호씨 욕심 채우려다 그런 거 아닌가요. 왜 엄하게 남 탓을 해요.

몇년생이냐구요? 아휴, 갑자기 왜 미성년자 단속 경찰 분위기…. 그 시대를 살아 보지도 않았으면서 쉽게 말한다구요. 네, 저는 광주도 모르고 고문도 모르고 군대도 몰라요. 그래도 순임씨 남편 같은 사람도 있던걸요. 참 착하시더군요. 죽어 가는 아내의 첫사랑 영호씨를 찾아 양복까지 새로 사 입혀 아내에게 데리고 가는,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 분이 간직한 순수는 뭐죠.

네, 광주요. 광주 얘기 해보죠. 영호씨는 정말 때묻지 않은 모습이었어요. 다리에 총알이 박혀 구두 속에 피가 흥건하게 고인 것도 모르고 "군화에 물이 찼나 보다"며 다리를 절던 모습이 막내동생 같았어요. 꼭 안고 울어 주고 싶었어요. 아무 준비없이 내몰린 탓에 영호씨는 한번에 바스러진건가요? 군화에 밟혀 조각난 박하사탕처럼.

순임씨랑 결혼하지 않았어요? 순임씨는 이미 죽었다구요? 무슨 말인지. 여고생…. 광주에서 영호씨가 실수로 그 여고생을 죽일 때 순임씨도 이미 죽은 거라구요. 아! 그랬던 거군요. 그날 이후로는 늘 가면을 쓰고 살았군요. 면회 온 순임씨를 외면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식당 집 딸과 결혼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경찰이 된 거 말이에요. "그 여자가 걷는 길을 걷고 싶고, 그 여자가 보는 바다를 나도 보고 싶다." 하하. 순임씨가 살고 있는 군산에 출장 와서 술집여자 꼬실 때 했던 그 말은 정말 그럴 듯 하던데요. 안 넘어 오는 여자 없겠어요. 하긴 영호씨에게 순수는 언제부터인가 여자 꼬실 때나 가끔 꺼내 바르는 향수 같은 거였나 봐요. 이미 썩어들어 냄새 나기 시작한 영호씨의 겉 모습을 감추는 짙은 향수. 이제 조금 당신을 이해한 것 같다구요? 뭉뚝하고 못생겼는데 참 착하게 생긴 영호씨의 손, 그 손을 숨기고 사느라 영호씨는 많이 슬펐군요.

처음에는 영호씨가 피해자인 양 행동하는게 싫었어요. 멀쩡하게 잘 사는 사람들도 많은걸요. 맞아요, 저는 아직 젊고, 노력하면 뭐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영호씨도 그랬겠죠. 존경한다구요? 누구를. 아직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요? 영호씨 말 듣고 보니 그러네요. 갈기갈기 찢기고도 아무렇지 않게 숨 쉬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 무너뜨려도 무너뜨려도 다시 살아보겠다고 악다구니 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말 독하고 무서운 사람이군요.

발 뒤꿈치에 박힌 굳은 살이, 두려움이 가득한 동그란 눈이, 유난히 슬퍼 보이던 그 대학생이 일기장에 적었던 말 기억하시나요. 영호씨가 고문했던 그 대학생. "삶은 아름답다." 네. 삶은 아름답다고 끊임없이 속이며 그래도 살아가는 우리, 듣고 보니 우리가 영호씨보다 훨씬 지독한 사람이었군요.

최지향기자 misty@hk.co.kr

그림=신동준기자

● 김영호의 20년

99년 봄 철길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절규하며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몸을 돌린다. IMF를 겪으며 사업도 망하고, 증권으로 재산도 날렸다. 아내와도 이혼했다.

94년 여름 꽤 잘 나가는 가구 대리점 사장. 아내는 운전학원 강사와 바람이 났고, 영호도 사무실 여직원과 바람을 피운다. 생활은 권태롭기 그지없다.

87년 봄 죄의식 없이 대학생을 고문하는 닳고 닳은 형사. 회식 참석을 위해 잠시 고문을 멈추라는 동료의 말에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회식은 무슨 회식이야"라고 대꾸한다. 고문은 그저 일이다.

84년 가을 신참 형사.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한 경찰조직에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폭력은 여전하다.

80년 5월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 실수로 한 여고생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 여고생과 함께 순수도 그를 떠난다.

79년 가을 구로공단 야학생인 순임과 소풍을 나왔다. 그는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하고, 순임은 박하사탕 하나를 건넨다.

■ 아프고 잔인하게 사실적이지만 보고 또 보면… 상처가 아물어

2005년 1월1일 0시. 서울 혜화동 하이퍼텍 나다에서는 영화 ‘박하사탕’의 특별 상영회가 열린다. 2000년 1월1일 0시를 기해 개봉했던 이 영화를 기억하며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비를 털어 상영하는 것이다.

사실 ‘박하사탕’은 한번 본 후 또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유쾌한 영화는 아니다. 아프고 잔인한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 영호는 찢기고 긁히고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시 찢긴다. 상처 위에 소금 뿌린 듯 소름 끼친다.

영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사람들 중에는 "그 영화 차마 못 보겠다"는 이들이 많았다. 광주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나 고문의 악몽에 아직도 시달리는 소위 운동권 출신, 살던 집에서 내쫓기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등 서글픈 IMF 시절의 기억을 지닌 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관객도 많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술잔을 기울이며 통곡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영화 속 영호가 바로 내 모습이다. 나도 영호처럼 그 철길 위에 올라가 죽겠다’는 글이 등장해 관계자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영호를 연기했던 배우 설경구(36)도 "나는 그 영화 제대로 못 본다. 아프다. 너무 나약하고 여리고 순수해서 죽는 순간까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영호의 모습은 내가 연기했지만 아파서 못 보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 영화를 다시 보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 영화가 ‘독한 약’이기 때문이다. 너무 아파서 보기 힘들지만, 자꾸 보면 어느새 병이 치유되는 지독한 약이기 때문이다. "그 영화는 독이야." 설경구는 이창동 감독이 했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설경구는 이렇게 응답했다고 한다. "독이죠. 그러니까 이 영화 보고 나서는 꼭 소주로 해독해야 한다니까요."

최지향기자

■ 그때 한국일보에는

한국일보는 1999년 12월 25일자로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 인터뷰를 실었다.

당시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2000년 1월1일 0시에 개봉한 이유에 대해서도 "모든 과거는 지나간 미래다. 한 젊은이가 최초로 삶을 바라보던 자리로 가보자는 것이다. 그 꿈과 희망의 자리를 지나 온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지금 스무 살에게는 현재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영호의 지난 20년을 시간의 역순으로 따라간다. 그 20년에 대해 이창동 감독은 "우리는 지난 20년 한 개인을 내버려두지 않는 폭력과 독재가 일상화한 환경에서 살았다. 영호처럼 폭력에 편입하는 것이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흘러간 탓이라면 그 ‘함몰’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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