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개혁의 타깃으로 삼아온 ‘참여정부'가 보수 언론사의 사주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 대사로 내정하자 갖가지 궁금증과 뒷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이 같은 ‘탈(脫) 코드' 인사에서 누가 추천했는지, 홍 회장의 유엔 사무총장 진출은 가능한지 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참여정부와 중앙일보, 삼성 간의 우호적 징후들을 눈여겨보는 분석도 있다.◆ 참여정부와 중앙일보, 삼성 간의 우호 징후 = 이해찬 총리는 10월 유럽 순방 중 조선·동아일보를 맹비난하면서 "중앙일보는 역사 흐름에 맞춰 중심을 잡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져 온 보수언론 멤버 중 하나를 제외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총리의 발언 시점은 홍 회장의 주미대사 기용 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한 시점과 비슷하다.
홍 회장은 지난 해 참여정부 조각 과정에서 통일·외무 장관 후보 등으로 거론되기는 했지만 중앙일보와 참여정부의 거리 좁히기 징후는 금년 2월 노무현 대통령과 홍 회장의 특별대담 이후 뚜렷해졌다. 그 뒤 여권에선 "중앙일보가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평가한다"는 목소리들이 커졌다. 금년 7월 청와대 홍보수석실 양정철 비서관이 "조선·동아는 저주의 굿판을 집어치우라"고 공격했을 때도 중앙일보는 제외됐다.
참여정부와 삼성의 관계도 부드러워지고 있다. 노 대통령은 공사석에서 혁신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몇 차례 삼성을 칭찬했다.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이 정통부 장관으로 기용된 데 이어 삼성중공업 사장 출신의 한행수씨가 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되는 등 삼성 인맥의 정부·공기업 진출도 늘고 있다.
다리는 누가 놨나 노 대통령과 홍 회장은 14일 청와대에서 만나 홍 회장의 주미대사 기용 문제를 매듭 지었다. 하지만 홍 회장 중용 방안은 9, 10월부터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노 대통령은 11월 초 미국 LA 방문 직전에 홍 회장 기용을 결심했다는 게 정설이다. 중간 매개 역할을 한 인사로는 우선 열린우리당 김한길 의원이 거론된다. 김 의원측은 "김 의원이 10월쯤 노 대통령에게 홍 회장의 중용을 건의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또 여당의 386세대 실세인 모 의원이 홍 회장을 밀었다는 얘기도 있다. 여권 관계자는 "홍 회장 친척이 운영하는 업체가 이 의원의 지역구에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외교안보 라인에서 주미대사 문제를 검토해왔다"며 김 의원 등의 역할을 부인했다. 공식 라인에서는 정동영 통일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사무처 핵심 관계자들이 홍 회장 카드를 지지했다.
◆ 유엔 사무총장 도전과 대망론 = 중앙일보측과 청와대는 홍 회장의 유엔 사무총장 도전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 카드의 성사 여부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한 외교소식통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려면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북한 때문에 쉽지 않다"며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더구나 유엔 사무총장 도전을 선언한 태국 외무장관이 아세안 등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점도 불리한 요인이다. 반면 "북핵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되면 한국이 유엔 총장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희망론도 있으나 비관론이 우세하다.
때문에 홍 회장이 ‘대권 도전’이란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유엔 총장을 애드벌룬으로 띄운 것이라는 해석이 정치권 일각에서 나온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총리 보다는 주미대사 등의 우회적 코스를 밟는 게 대망 실현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아그레망 보다 앞선 내정자 흘리기 = 통상적으로는 외국에서 아그레망을 받은 후 대사 임명을 공식 발표한다. 하지만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주미대사 교체 방침을 밝히면서 "깜짝 놀랄 카드를 선택했다"고 발표한 16일은 정부가 미국측에 아그레망을 신청하지 않은 때였다.
정부는 17일 오전 신임 주미대사 아그레망 요청서를 미국측에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들은 "공식 문서로 아그레망을 요청한 것은 17일 전후"라면서 "그전에 구두로 미국측에 통보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때문에 "김 실장이 너무 서둘러 주미대사 내정자를 공개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 언론개혁 후퇴할라/ 시민단체 "신문시장 과열시킨 장본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주미대사 기용으로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언론개혁이 후퇴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치권은 신중한 입장이지만 언론·시민단체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격앙돼 있다. 홍 회장이 주미대사로 발탁된 뒤 언론개혁과 관련해 가장 큰 논란을 빚고 있는 대목은 홍 회장이 탈세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을 갖고 있다는 점과 신문시장의 무한경쟁을 촉발한 장본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홍 회장의 탈세에 대해선 2000년 5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30억원의 형이 확정됐다. 전국언론노조의 핵심 관계자는 "언론의 신뢰도를 추락시킨 홍 회장을 주미대사에 기용한 것은 언론권력의 부도덕하고 위법한 행위에 대해 정부 스스로 면죄부를 준 것"이라며 "이제 여권은 언론개혁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또 언론계 안팎에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각종 경품과 무가지 제공 등을 통해 신문시장의 출혈경쟁이 촉발되는 과정에서 중앙일보가 한몫을 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신문시장의 불법·탈법행위의 책임자를 주미대사로 중용한 것은 언론개혁에 대한 정면도전"(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라는 비난도 그래서 나온다.
여당의 당론 확정과정에서 ‘사주의 소유지분 제한’ 규정이 배제된 신문법 제정안에 대한 논란도 제기된다. 당시 여권이 이미 홍 회장을 감안한 배려가 아니냐는 추측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당의 한 의원은 "소유지분 제한 규정이 빠짐으로써 신문법안은 이미 개혁과는 거리가 멀어졌다"며 "홍 회장이 기용된다고 해서 신문법을 비롯한 언론관계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더 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내다봤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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