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통기타 반주에 막걸리 한 사발, 밤은 깊어가는데 좀처럼 오지않는 막차…. 1970~80년대에 20대를 통과한 이들에게는 연인과 발을 동동 구르며 신촌행 기차를 기다리던 추억으로 남아있는 경의선 백마역. 90년대 초반 일산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이 백마역 일대의 주점과 카페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지만 이곳에서 2㎞ 가량 떨어진 경기 고양시 일산구 풍동 일대에 최근 몇년 사이 통기타 연주와 다양한 먹거리를 결합시킨 카페와 음식점들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백마카페촌의 옛 영화를 재현하고 있다.이 거리는 풍동 일대의 옛 지명인 ‘애현마을’에서 유래한 ‘애니골 거리’로 불린다. 마을 어른들은 "애니골이란 명칭은 ‘애현고을’을 마을 사람들이 발음 나는대로 애현골-애인골-애니골로 불러 생겨난 이름"이라고 전했다.
기찻길 옆 논두렁과 고즈넉한 소나무숲 대신 높고 뾰족한 아파트들로 사방이 포위됐지만 애니골 거리에서 백마카페촌의 추억을 되살리기는 어렵지 않다. 통기타 카페 일색이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 이곳에는 각종 음식점과 카페 등 80여개가 줄지어 들어서 있다. 가족 단위 손님들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는 패밀리레스토랑과 보리밥집에, 갤러리와 카페를 겸한 집도 있다. 오리숯불구이 레스토랑 등 이른바 퓨전 음식점들도 눈에 띈다.
그렇더라도 그 중심에는 여전히 ‘화사랑’ ‘쉘부르’ ‘숲속의 섬’ 등의 라이브 카페가 있다.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나 발라드 가수들이 새벽 2~3시까지 나와서 노래하고, ‘학골’ ‘블루스 시저스’처럼 손님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손님들은? 청춘의 해방구였던 백마카페촌을 찾던 20대의 젊은이들은 이제 가족의 손을 잡고, 또 추억을 함께 나눴던 친구들과 애니골 거리를 찾는 30, 40대가 됐다.
고교 동창생들과 함께 송년 모임차 ‘화사랑’을 찾아왔다는 주부 이은주(36·경기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씨는 "통기타 음악만 흘러나오면 옆 테이블의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인사하고 금세 모두 친구가 됐던 옛날 분위기가 아직은 남아있다"며 "백마카페촌이 청년들의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이제 남편, 부모님, 자녀들과 함께 찾을 수 있는 가족 공간으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보다 경제 사정이 더 어렵다는 요즘이지만 애니골 거리는 주말이면 가게마다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황이다. 미사리 일대의 라이브 카페촌에 비해 가격이 50~60% 정도로 저렴하고, 인천 김포 부천 등지에서도 1시간 이내에 찾아올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기도 하다.
백마애니골번영회 이석재(45) 사무국장은 "90년대말 모텔 3~4곳이 들어오려 했을 때 상인들이 합심해서 막아낸 것이 애니골 거리가 가족중심 공간으로 자리잡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수도권 다른 지역이 러브호텔이 난립하면서 불건전한 공간으로 인식돼 최근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덧붙였다. 애니골 거리의 터줏대감으로 통하는 김원갑(57) ‘화사랑’ 대표는 "최근 애니골 안쪽으로 고층 아파트가 줄줄이 들어서 울창한 소나무숲이 사라져가는 점이 아쉽다"며 "단순히 먹고 즐기는 거리가 아니라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서로의 문화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양=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