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90세 노인이 됐다. 주저앉아 울음부터 터뜨릴 나이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23일 개봉)의 소피는 다르다. 거울을 보며 하는 말. "괜찮아 옷도 더 잘 어울리고 건강해 보여." 금세 자신을 인정하고, 저주를 풀기 위해 마법사 하울의 성을 찾아 나선다. 매우 의연한 모습으로 말이다.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당연하겠지만,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세상의 혼탁함이 모성으로 재생된다는 줄거리와 모성을 대표하는 여자 주인공의 등장, 선인도 악인도 아닌 등장인물 등은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는 뗄 수 없이 닮은 꼴이다.
마법사 하울과 그를 괴롭히는 왕실 마법사 설리만의 관계는 ‘센과…’에서 유바바-하쿠의 관계와 비슷하다. 스승 유바바를 쓰러뜨려야 치히로를 구해낼 수 있었던 하쿠처럼 설리만의 애제자였던 하울도 스승의 뜻에 맞서 싸운 끝에 미래의 신부 소피를 얻어낸다.
영웅신화적 줄거리를 담고 있는 ‘하울…’에서 영웅은 전쟁을 막아 낸 하울인 듯 보인다. 하지만 영웅은 오히려 소피이다. 하울은 몸치장에 2시간이나 들이고 실수로 머리카락을 엉뚱한 색깔로 염색한 후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다.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전사이지만 알고 보면 두려움에 떨며 방안 곳곳을 부적으로 도배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정신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전후 일본 남성상을 반영하는 듯 하울은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하다.
하울이 힘을 지닐 수 있던 이유는 소피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센과…’에서의 치히로처럼 소피는 목숨을 걸고 하울을 사랑하고 빼앗긴 하울의 심장을 찾아내 돌려 준다. 치히로가 만인이 혐오하는 얼굴 없는 신, 가오나시에게서도 친절을 베풀 듯 소피는 자신을 해쳤던 이들까지도 사랑한다. 재혼을 위해 딸에게 나쁜 짓을 하는 철 없는 엄마도, 자신을 할머니로 만든 ‘황야의 마녀’까지도 감싸 안는다. ‘모성이야 말로 세계를 재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임을 강조해 온 미야자키 영화의 여주인공 가운데서도 가장 매력적이다. 그 매력에 설리만의 애견은 주인을 배신하고 소피를 따라 나설 정도다.
소피가 할머니로 변한 것은 노골적인 ‘여성성’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영화 속에서 소피는 가끔 18세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30대 또는 50대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소피에게서 예쁜 모습을 빼앗은 대신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사랑스러운 주인공에게 가장 행복한 해피 앤딩을 선물한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관람 포인트 4
● 하울의 목소리는 기무라 타쿠야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최초로 누드씬과 키스씬을 소화해낸 꽃미남 주인공 하울은 일본 최고의 남성그룹 SMAP의 멤버 기무라 타쿠야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심장 없는 미남 청년 하울은 어쩐지 기무라 타쿠야의 모습과 자꾸 겹쳐진다.
● 최고 귀염둥이 캐릭터 ‘캘시퍼’
불을 피워 하울의 성을 움직이게 하는 캘시퍼는 하울의 비밀을 쥐고 있다. 끊임 없이 수다 떨고 크게 입을 벌려 우적우적 장작을 집어 삼키는 등 ‘하울…’에서 가장 귀여운 캐릭터.
● 아름다운 명소 여행
미아쟈키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하울…’의 공간성과 시간성은 모호하다. 스위스 거리, 파리의 궁전, 이탈리아의 해변, 근대의 기차와 자동차 등 직접 痴嗤?찾아 다니며 스케치한, 시·공간이 혼합된 이국적인 화면은 낯설면서도 멋있다.
● 마지막에 깜짝 반전
반전 하나쯤 없으면 유행에 떨어지는 분위기. ‘하울…’의 마지막에도 깜짝 반전이 준비돼 있다. 소피의 뒤를 폴짝폴짝 따라다니며 위기 때마다 도와 주던 ‘무대가리’의 정체는? 디즈니 영화를 비꼬는 반전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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