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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을 물었더니-이기창 대기자의 선지식과의 대화] 무여(無如)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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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을 물었더니-이기창 대기자의 선지식과의 대화] 무여(無如) 스님

입력
200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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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들지요."스님의 음성은 나지막하되 힘이 실려 있다. 세속에서도 차 한잔의 나눔이 주객의 거리를 좁혀주는 가교이거늘, 하물며 산사에서는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윽한 차의 맛에는 선(禪)의 향기가 스며 있지 않은가.

축서사(鷲棲寺·경북 봉화군)의 선객 무여(無如) 스님의 말은 생면부지의 길손을 상대로 근기를 저울질하는 법거량이 아닐터.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배려일진대 차 한 모금 머금는 찰나에 머리 속으로 오만 생각이 스쳐간다.

‘차 한 잔’의 지극히 평범한 말 속에는 무명을 단박에 끊는 비수가 숨겨져 있다. 끽다거(喫茶去)의 화두다. 말 그대로 ‘차 한 잔 들게나’인데, 분별을 여읜 경지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곧 삼매 아닌 것이 없는 법.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삶은 바로 수행의 연장이고 진리 그 자체임을 그 화두는 일러준다.

작설로 입을 축이고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보이는 스님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러 있다. 자신을 한 없이 낮춘 하심(下心)을 머금은 미소였다. 몸에 달라 붙은 욕망의 살점이 화로 위 한 송이 눈처럼 녹는 듯 싶다. 준비해간 질문이 제법 됐지만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래 비우자, 비우고 법의 향기로 채워가자.

"삶의 길은 쉼 없이 자기를 완성해가는 긴 여행입니다. 부처님이 누구입니까. 가장 완벽한 인간, 즉 인격의 완성자입니다. 그 분처럼 살기 위해선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무엇인들 제대로 알겠습니까.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는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올해로 세수 예순 다섯, 바랑을 메고 구도의 길을 걸은 지 어언 40년. 스님은 쉬운 이야기로 말문을 튼다. 설명이 뒤따랐다. 자기완성은 곧 남을 위하는 길이라고. 자기완성의 길에서 저절로 복을 짓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복을 짓는 행위는 자비의 실천이다. 자비의 씨앗을 간직한 사람은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스님은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의 가르침을 예로 든다. 어느 곳에 머문다고 하는 생각은 이미 집착의 때가 묻은 것이어서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갈등의 칼날은 어리석은 마음에서 예리하게 벼려집니다. 마음이 머무는 곳, 거기서 갈등과 대립의 싹이 틉니다. 애착과 번민이 생기는 거지요. 머무는 마음을 그래서 생사윤회의 굴레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랑도 집착의 멍에가 씌워지면 고통으로 바뀝니다."

욕망의 화신인 보통 사람이 어찌 그런 마음을 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에둘러 끄집어냈다.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저마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그것이 곧 수행의 시작이라는 풀이가 곁들여진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면 매일 일정한 시간을 자기를 찾고 점검하는 데 쓰라고 권한다. 꼭 머리를 깎는 길만이 수행의 조건이 아니라는 조언이다.

다만 일상에서 잠시라도 마음을 비우는 습관을 기르라고 주문한다. 비움은 쉼과 통한다. 일체의 관념과 생각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빈 자리를 ‘나는 무엇인가’라는 일념으로 채운다. 바로 ‘이 뭣고’의 화두인 셈이다.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의문이자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의문을 하나로 묶는 진리의 언어다.

"여기 저기서 삶이 힘겹다고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한 생각을 돌리면 분명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자기점검에 있다. 자기라는 작품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작업인 것이다. "삶의 모든 해법은 자기 손에 있습니다. 그러니 해법을 찾느냐 미망에서 헤매느냐는 자기책임이지요.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 누가 대신 살아주는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스님의 말이 와 닿는다. 자기 자신의 주인공이 되면 삶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것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그야말로 지식의 홍수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남의 지식을 빌려 쓰면서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게 범부의 삶입니다. 대립과 갈등을 부르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을 제 것으로 만들어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지식을 부리는 주인이 됩니다."

재물도 마찬가지다. 석가세존 당시 수달다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소유의 삶을 강조하는 세존의 설법에 갈등을 거듭하다가 세존을 찾아갔다.

"재산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너는 더 가져도 좋으니라."

수달다를 한자로 옮기면 급고독(給孤獨)이다. 외롭고 소외받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붙여진 이름이다. 수달다의 보시는 너와 남을 초월한 자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세존은 더 가져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나눔과 정재(淨財)의 미덕을 전해주는 일화다.

말머리를 참선과 간화선으로 돌렸다. 화두라는 게 천년도 넘는 저쪽 세월의 수행법인데 영원히 유효한지, 늘 궁금했다. 분수를 모르고 "간화선은 수행의 엘리트에게만 적용되는 암호라고 여겨지는데요"라고 사족까지 달았다.

"너와 나, 있음과 없음을 떠난 진리의 말이 화두입니다. 진리는 시대를 뛰어넘습니다. 간화선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름길입니다. 얼마 전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이 한국을 찾아 화를 다스리는 법을 이야기했고 많은 사람이 감동 받은 줄 압니다. 그런 수행법은 간화선의 가장 초보적 단계지요. 부처님은 애초부터 화라는 말을 잊은 분입니다. 부처님은 다만 연민을 갖고 있었을 뿐이지요. 깨달은 사람은 분노와 미움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으로 세상을 대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더니 방문을 나서자 어느새 문수산 주위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 앉았다. 해발 1,206m의 문수산 중턱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축서사는 독수리가 서식하는 절이란 뜻이다. 인도에서 독수리는 지혜를 상징하는 새이다. 석가세존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로 꼽히는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의 의미도 축서사는 함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절집에서는 비로소 축서사가 이름에 걸맞은 도량이 됐다고 말한다. 눈 밝은 납자가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다.

lkc@hk.co.kr

● 무여스님은 누구

"천상천하 무여불(天上天下 無如佛)이라, 세상에 부처님 같은 분은 없다는 조사의 말씀이다. 그러니 부처님처럼 살아라." 선교를 겸수한 당대의 석학 탄허(呑虛) 스님은 그 같은 법문을 하면서 무여라는 법명을 내렸다. 은사스님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스물 여섯에 탄허 스님으로부터 오대산 상원사에서 계를 다시 받는 자리였다. 제자에 대한 기대가 남달리 컸던 스승은 참선에 앞서 경전공부를 먼저 하라고 거듭 일렀다. 그러나 화두의 선미(禪味)에 빠진 제자의 귀에는 스승의 당부가 멀게만 들렸다. 1940년 경북 김천시에서 태어난 스님은 대학을 마치고 심신을 추스를 생각으로 집에서 가까운 절을 찾았다. 헌데 이게 무슨 조화 속인가.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으니. 비승비속의 신분이던 어느 날 한 스님이 그에게 ‘이 뭣고’의 화두를 던졌다. 그날 이래 이 화두는 구도의 길에 동행이 되었다. 화두를 탐구하면서 발심, 머리를 깎고 운수행각에 나섰다. 중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스님의 느닷없는 출가소식에 집안이 뒤집혔다. 자취가 없으니 집에서도 찾다가 포기했다. 대신 스님은 불효에 대한 속죄의 뜻으로 한눈 팔지 않고 정진에 매달렸다.

불교에선 모든 선행과 공덕의 근본이 효이며 시작 또한 효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도 재가자의 효는 부모에게 한정되지만 출가자의 효는 모든 중생의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적극적인 보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금도 경전의 가르침은 무여스님의 마음을 달래준다. 제방선원을 돌며 40년간 안거수행을 해온 스님은 칠불사와 망월사 선원장을 역임했다. 88년 축서사로 발길을 돌린 스님이 이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물기는 처음이다. "축서사는 수행처로서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어딘가 안정감이 부족함을 느꼈어요. 비유하자면 지식은 많은데 덕이 모자라는 사람 같았거든요." 축서사는 무여스님의 원력에 따라 선의 도량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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