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40년이 다 된 70대 노인이 술을 마시고 걸핏하면 가족들을 폭행하다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 결정을 받아 인생의 황혼기에 외톨이 신세가 됐다. 한국전쟁 당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A(73)씨는 남한에서 부인 B(66)씨를 만나 3남 1녀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술만 마시면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됐다. 부부가 3남1녀를 모두 결혼시키고 서울 은평구 구산동 전셋집에서 자녀들이 보낸 용돈으로 생활하는 최근까지 A씨의 주벽은 변하지 않았다. A씨는 이달 초 며느리의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신한 딸에게 전화를 걸어 "올케 언니의 생일도 모르냐. 죽여버리겠다"는 등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퍼부었다.이를 보다 못한 부인 B씨가 "아버지가 자식에게 어떻게 그런 욕을 할 수 있냐"며 항의하자 전화기로 머리와 손을 때려 전치 6주의 상처를 입혔다. 지난날 남편의 폭행으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어도 아이들과 주변의 눈을 생각해 참았던 B씨였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판단,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A씨를 긴급체포한 뒤 법원에 ‘B씨 주변 100m 이내 접근금지 임시조치’를 신청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형사3단독 박순성 부장판사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법원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퇴거 및 격리, 접근금지 임시조치, 유치장이나 구치소 수감 등 가정폭력범죄에 관한 특례법에 제시된 3가지뿐. A씨의 행위나 죄질로 봐서는 퇴거·격리나 100m 접근금지 임시조치가 적절하지만 이 경우 연로한 A씨는 집에서 쫓겨나 어디선가 혼자서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 구산동 B씨의 집에서 떨어져 사는 자녀들 중 누군가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겠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지만 3남1녀가 한결같이 A씨의 주벽과 행패에 넌더리를 치며 보호하기를 꺼려했다. 그렇다고 나이 든 A씨를 추운 겨울날 차디찬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수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박 부장판사는 가정폭력범죄 특례법의 법조문을 샅샅이 뒤져 보호시설위탁이라는 전례가 없는 임시조치를 생각해냈지만 강제조항이 아니어서 문제였다. 결국 판사는 가족들을 불러 "자녀가 모시지 않으면 아버지를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수감할 수밖에 없다"고 마지막으로 경고했고, 가족들은 "100m 접근금지 결정이 내려질 경우 돈을 모아 아버지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보겠다"고 말했다. 법원은 13일 A씨에 대해 "지금부터 2005년 2월까지 B씨 주변 100m 이내 접근금지를 명한다"는 임시조치를 결정했다. 내년 2월 이후 A씨는 부인과 자식들의 ‘처분’에 따라 다시 가정법원의 정식조치를 받아야 한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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