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에 이어 모하메드 엘바라데이(사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미국의 축출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다 국제기구 수장에 오른 뒤 독자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닮은 꼴이다.미국 뉴욕대 국제법 박사인 엘바라데이는 1964년 이집트 외교관으로 공직을 시작했으나, 84년 법률고문으로 IAEA에 들어온 뒤 91년 대외관계 사무차장보까지 오르는 등 IAEA에서 잔뼈가 굵었다. 97년엔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의 후임으로 경선에 출마해 한국의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당시 1차 투표 나섰던 유력한 후보들은 결선 투표에 앞서 일제히 사퇴, 엘바라데이 당선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뒷얘기가 분분했다.
그는 핵 군축 관련 전문 지식과 뛰어난 협상력으로 2001년 연임에 성공했고, 내년 3차 연임도 확실시되는 상태다. 조셉 바이든 미 상원의원(델라웨어·민주)은 12일 CNN에 출연해 "엘바라데이는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듣기 원하는 말이 아니라 옳은 말을 하는 정직하고 공정한 사람(straight shooter)"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영국의 인디펜던트지도 "국제 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한 존경 받는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한때 미국의 지원 의혹까지 받았던 엘바라데이가 미국과 멀어지게 된 계기는 지난해 이라크전. 그는 미국이 개전을 앞두고 ‘이라크가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사들였다’는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의혹을 부풀릴 때마다 ‘낭설’이라고 반박, 부시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결정적으로 미운 털이 박힌 것은 이란 핵 문제 해법을 둘러싼 마찰이었다. 미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은 이란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 제재하는 등 사정없이 압박하길 원했지만 엘바라데이는 지난달 유럽과 손잡고 이란 핵 동결과 보상을 규정한 IAEA 결의안을 이끌어냈다.
당초 엘바라데이에게 2차까지만 일하라고 몰아세우던 미국은 아난 총장 기립박수 사건처럼 IAEA 이사국 상당수가 되려 3차 연임을 요청하자 아예 축출로 전략을 변경했다는 게 IAEA 내부의 시각이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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