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8년 12월10일 이슬람 철학자 이븐 루슈드가 모로코의 마라케흐에서 작고했다. 향년 72.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권에 속해 있던 시절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주로 남부 스페인에서 활동한 이븐 루슈드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에 대해 치밀한 주석을 남김으로써 고대 그리스와 근대 유럽을 인문주의의 실로 이어놓은 사람이다. 이븐 루슈드는 유럽에 아베로에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13세기 이후 라틴세계에 아베로에스파(派)라는 이름의 철학·자연과학 학파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보편적이었다.이슬람 신학자이기도 했던 이븐 루슈드는 이단으로 몰려 코르도바 근처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는데, 그 빌미가 된 것이 그의 범신론적 세계관이었다. 이븐 루슈드는 자연을 ‘능산적(能産的) 자연' 곧 태어나게 하는 자연과 ‘소산적(所産的) 자연' 곧 태어난 자연으로 나누었다. 능산적 자연은 종교적 신심(信心) 속의 무제약적 존재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더 넓게는 우주 질서나 유기적 생산력을 가리킨다. 소산적 자연은 좁은 의미의 자연, 곧 피조물이다.
기독교인들의 이베리아 재정복이 완료된 15세기 말 이래 유럽인들은 이슬람 학자들이 아랍어로 남겨놓은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며 자신들의 잃어버린 고대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이븐 루슈드의 능산적 자연을 나투라 나투란스(natura naturans)로, 소산적 자연을 나투라 나투라타(natura naturata)로 번역했다. 이 구별은 유럽의 범신론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비쳤고, 장작더미 위에서 죽은 브루노를 거쳐 마침내 ‘에티카'의 저자 스피노자의 펜을 통해 유럽 철학사에서 영토를 확보했다. ‘자연'을 의미하는 라틴어 나투라는 ‘태어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왔고 나투란스와 나투라타 역시 이 동사의 활용형이어서, 나투라 나투란스와 나투라 나투라타라는 표현은 그 말맛이 독특하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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