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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野黨 한길… 문민化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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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野黨 한길… 문민化 밑거름

입력
2004.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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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이민우 前 신민당 총재9일 별세한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는 군부정권 하의 정치 암흑기인 1980년대에 야당의 명맥을 유지,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등 문민대통령이 나오도록 하는 데 밑거름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전 총재는 ‘어진돌’이라는 뜻의 인석(仁石)이란 호처럼 서민적 풍모에 후덕한 인품을 지녔다. 정치 역정 내내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거목의 그늘에 가렸지만 정통 야당 정치인으로서 민주화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특히 전두환 정권 하인 85년 정치규제에서 풀려나지 못한 양김의 지원을 받아 신한민주당을 창당, 초대 총재가 된 뒤 2·12 총선(12대)때 서울 종로·중구에서 야당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2·12 총선의 신민당 돌풍은 ‘여당의 2중대’로 불리던 민한당의 몰락을 가져왔고 전두환 정권에 강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 말기 직선제 개헌 논의가 절정에 달했던 86년 말 내각제 개헌을 암시하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 이 파문으로 신민당이 분당 사태에 이르자 결국 87년 정계 은퇴를 선택했다. 이후 정치와 인연을 끊고 조용하게 말년을 보냈다.

1915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41년 일본 메이지대 법학과를 중퇴한 뒤 46년 충북신보 영업국장을 거쳐 48년 청주에서 시의회 부의장에 당선,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58년 4대 민의원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 6선 했으며, 윤보선-유진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구파에 속한 뒤 한번도 계보를 바꾸지 않았다. 9대 국회 후반 신민당이 YS와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세력이 대립할 때 YS 단일지도체제를 지지, 동지관계를 형성했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 故 김동조 前 외무장관

9일 별세한 해오(海吾) 김동조(金東祚) 전 외무장관은 냉전시대 한국 외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김 전 장관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주도한 우리측 협상 대표였으며, 67년부터 6년간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껄끄러웠던 대미관계를 매끄럽게 풀어냈다. 외교사적으로 김 전장관은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대일 관계 정상화 협상 작업을 넘겨받아 협상을 매듭짓고, 월남전 파병 및 국군현대화계획 막후 교섭 등에 참여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다.

그의 이런 활약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직업 외교관으로 유일무이하게 주일, 주미대사를 지냈다. 주미대사 시절에는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관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정빈 전 외교부 장관은 "김 전장관은 선이 굵어 후배들이 많이 따랐으며, 뚝심있는 협상으로 한국 외교관의 위상을 높였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외교부에는 ‘김동조 사단’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1943년 일본 규슈(九州)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김 전장관은 같은 해 고문행정과 합격했고 해방 후 51년 외무부 정무국장에 취임하면서 직업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73년부터 3년간 16대 외무장관을 지낸 뒤 외무부를 떠나 석유개발공사 사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81년부터는 변호사 활동을 해왔다. ‘회상 30년 한일회담’ ‘회상 80년 김동조의 회고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에 유명인들이 많아 정몽준 의원은 김 전장관의 막내 사위,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사장은 외손녀 사위이다. 김 전장관의 장지는 경기 포천시 내촌면 서릉공원으로 결정됐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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