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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내린 '39년 오디세이'/日서 안식처 찾은 탈영·월북 미군 젠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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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내린 '39년 오디세이'/日서 안식처 찾은 탈영·월북 미군 젠킨스

입력
200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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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인생을 아내와 딸들에게 바치며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이 섬은 아내가 늘 이야기했듯이 정말 아름답군요" 주한미군 탈영·월북자이자, 북한에 납치당했던 일본 여성의 남편이기도 한 찰스 로버트 젠킨스(64)는 7일 니가타(新潟)현 사도(佐渡) 섬에 안착한 뒤 이같이 말했다. 무려 39년 동안 한반도의 냉전에 휘말려야 했던 그가 마침내 아내의 고향이기도 한 일본의 외딴 섬 마을에 안주의 닻을 내린 것이다.그는 이날 밤 새 보금자리인 이 섬의 시영주택에서 부인 소가(曾我) 히토미(45), 두 딸 미카(美花·21) 브린다(19)와 함께 행복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는 주일 미군 자마(座間)기지에서 24일간의 금고형 복역과 불명예제대 절차를 마치고 이날 아침 부인의 고향으로 향했다. 자유의 몸이 되기 직전 타임과 가진 인터뷰에서 "딸들을 북한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 내 인생에서 단 하나 잘 한 일"이라고 말했다.

주한미군 제1기병사단 8연대 1대대 C중대의 판문점 부근 비무장지대(DMZ) 순찰분대 분대장(하사)이던 젠킨스는 1965년 1월 5일 월북했다. 전사자가 많이 나던 베트남으로의 전속이 두려워서 였다.

그러나 북한 생활은 그를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다른 미군 탈영병 3명과 함께 생활한 그는 끊임없는 가혹행위와 고문,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공작기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영화에서 미국 스파이 역을 맡기도 했던 그는 평양의 소련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가 붙잡히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1980년 8월 8일 자신에게 영어를 배우던 일본인 납치 피해자 소가와 결혼했다. 소가는 1978년 8월12일 고향 사도 섬에서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돼왔다. 납치될 때 19세의 간호사 실습생이었다.

2002년 9월17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의 첫 정상회담에서 ‘일본인 피랍자 5명 생존, 8명 사망, 2명 입국 미확인’을 시인하면서 이 기구한 부부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같은 해 10월17일 소가는 다른 생존자 4명과 함께 일본에 돌아왔지만 젠킨스와 두 딸은 평양에 남겨졌다.

2004년 5월22일 고이즈미 총리가 두 번째 방북에서 다른 4명의 자녀들은 데리고 돌아왔지만 젠킨스와 두 딸은 또 남겨졌다. 북한의 진의와 출국 형식, 탈영병 젠킨스에 대한 미국의 소추면제 여부 등 복잡한 외교문제가 얽혔기 때문이다.

젠킨스는 7월9일에야 ‘제3국 가족재회’라는 명목으로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나와 소가를 만났고 ‘젠킨스의 신병치료’를 명목으로 7월18일 일본으로 왔다. 병원 입원, 미군 출두, 유죄 답변 사법거래(플리바겐), 복역과 제대의 절차를 밟으며 젠킨스씨는 "월북은 내 생애 최대의 실수"라고 수 차례 말해왔다.

그러나 젠킨스 가족이 북한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는 어렵다. 소가와 함께 납치당한 어머니 소가 미요시(당시 46세)의 행방과 생사를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에 도착한 젠킨스는 곧바로 입원 중인 장인 소가 시게루(曾我茂·72)를 찾아 첫 인사를 올리며 위로했다.

사도 섬을 연락선으로 연결하는 니가타항에는 매달 만경봉호가 들어올 때마다 납치피해자 가족들의 항의시위도 벌어진다. 옛날 유배지로도 사용됐던 사도 섬 사람들은 일본어를 못하는 젠킨스와 두 딸을 위해 한국어로 ‘환영’이라는 간판을 세워두었다.

도쿄=신윤석특파원 ysshin@hk.co.kr

■젠킨스의 말말말

"내 생에 최대 실수가 월북이라면, 가장 잘한 일은 딸들을 북한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 12월6일 타임과 인터뷰에서 북한생활 39년을 회고하며 )

"한국에는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많아 누구도 이 아이들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 타임과 인터뷰에서, 북한이 자신의 두 딸에게 간첩교육을 시켰다며 )

"월북이후 생활이 너무 힘들어 죽고 싶어지곤 했다. 39년 전 탈영하던 그날 밤으로 돌아가고 싶다"

( 11월3일 주일미군 군사법정에서 )

"한 미친 남자의 관점에서 본 집단 투쟁 정도로 기억되는 김일성 관련 글을 7년간 하루 10시간씩 학습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미군’이란 문신이 새겨진 어깨 피부를 벗겨내기도 했다."

( 법정증언에서 북한 생활상을 전하며 )

"북한은 간호사였던 소가 히토미를 교사로 착각해서 납치하고, 쓸모가 없자 내 감시자로 붙였다."

( 11월19일 일 후지TV 인터뷰에서 부인 소가와 만난 배경에 대해 )

"올해 5월 평양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만나기 전 북한 관리들이 ‘총리와의 일본 동행을 거부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 9월1일 홍콩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와 인터뷰에서, 북한이 자신의 일본행을 막고, 총리면담을 도청했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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