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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날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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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날치기

입력
200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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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물건을 날쌔게 가로채는 짓, 또는 그런 도둑. 비유적으로도 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날치기의 뜻 풀이다. 민주 헌정의 중심인 국회의 다수당이 잊을만하면 저지르는 짓이 원래 이렇게 범죄적 행위를 일컫는다는 풀이가 오히려 새삼스럽다. 워낙 오래 전부터 국법질서의 근본인 헌법을 고치는 일까지 날치기로 해치우는 것을 지켜보는 데 익숙한 탓일 것이다. 나라의 주인 된 권리를 국회의원에게 위임한 국민도 자신들의 주권을 가로채는 것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그저 꼴불견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국민 다수의 주권을 위임 받은 셈인 국회 다수당이 변칙이나 편법으로 법안을 상정하거나 통과시키는 것을 범죄에 비유하는 것은 지나친 점도 있다. 그게 국민 다수의 뜻을 거슬러 독재를 연장하킬? 국민의 권리와 복지를 해치는 악법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국민과 나라를 위한 고상한 명분을 지닌 법안을 논의하는 것조차 소수당이 한사코 막고 나서는 상황에서는 문자 그대로 다수의 힘을 동원해서라도 뜻을 이루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항변할 만한 것이다.

■ 이걸 헤아린 때문인지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안 날치기 상정을 언론마다 달리 부르는 것이 눈에 띈다. 곧장 날치기로 규정하는 대신, 변칙 편법 단독 일방 기습 등 갖가지 표현을 쓴다. 언론 성향에 따른 선택이지만, 적법성과 효력을 딱 부러지게 판정하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야 의원들이 아우성치며 부딪치는 가운데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려 법안 상정을 홀로 선포한 것은 역시 날치기다. 그게 잡다한 논란을 떠나 국민의 상식과 언어관습에 들어맞는다.

■ 이렇게 보면 날치기한 속내가 못내 궁금하다. 스스로 욕하던 짓을 감행할 때는 그만한 계산이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논의하지 않겠다니 어리둥절한 것이다. 다음에 법안을 본회의에 올려 다수결로 처리할 속셈인지 모르나, 지금으로선 뭘 위해 그 소동을 피웠는지 알 수 없다. 국보법 폐지안 상정만으로 뜻 깊다고 말하지만 다수여론이 폐지에 반대하고 날치기를 개탄하는 것과 동떨어진다. 명분이 아무리 선(善)해도 날치기는 결국 의회정치의 실패를 알리는 악이다. 그 참담한 현장에서 만세 부르는 의원들의 모습은 실로 구태의연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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