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전자산업 정문식(43·사진) 사장은 요즘 김치 공장에 자주 들르고 있다. 1996년부터 겨울이 다가오면 정 사장은 배추와 무를 일괄 구입해 임직원 부인들의 도움으로 김치 공장에서 김장 김치를 만들어 무상으로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다. 올해도 협력사를 포함한 임직원 1,000여명에게 나눠주기 위해 60톤 분량의 배추와 무를 준비했다. 삼성전자, LG전자와 함께 ‘디지털 가전 3사’로 불리는 첨단 기업의 대표가 ‘김치 만들기’에 나선데는 정 사장의 개인적인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창업 초기, 아내가 배추 값이 비싸 김장 담그기가 겁난다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어린 시절에는 재래시장에서 닭에게 모이용으로 준다며 배추 잎을 얻어다가 김치를 담그기도 했습니다.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김장 김치를 담가주면 제가 겪었던 김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정 사장이 1990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5평 크기의 반지하 창고에서 히네스(전선 케이블) 가공업을 창업했을 때 오늘과 같은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시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경야독으로 서울 한양공고 야간반을 졸업한 뒤 ‘낙하산을 타면 1만원씩 번다’는 친구 말을 그대로 믿고 특전사 하사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직후의 일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정 사장은 이레전자산업이 연매출 10억원 정도를 올리던 90년대 중반 디지털 기기 제조업으로의 변신을 결심했다. 저임금을 무기로 중국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제품이 속속 반품되는 것을 보면서 정 사장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독일 하노버 전자박람회에 갔다가 독일에서 휴대폰이 이동통신사들의 보조금 지급으로 단돈 1마르크(약 800원)에 팔리는 것을 보면서 ‘휴대폰이 뜨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정 사장은 숱한 실패를 거듭한 끝에 휴대폰에 필수적인 충전기를 제작, 시장에 내놓았다. 예상대로 국내 시장에서 휴대폰은 가격이 낮아지면서 급속히 대중화했고 충전기는 없어서 못팔 정도가 됐다. 남보다 한발 앞서 시장을 내다본 것이 들어맞은 것이었다.
이레전자산업은 당시의 급성장을 발판으로 현재 액정표시장치(LCD),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광대역코드분할다중접속(WCDMA) 휴대폰 등 첨단 디지털 기기를 생산, 연매출 1,000억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LCD와 PDP분야에서 이레전자산업은 삼성전자나 LG전자 못지 않은 기술력으로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창업 자금 50만원으로 시작해 14년만에 이뤄낸 성과다. 하청업체의 설움을 직접 체험한 정 사장은 이레전자산업의 협력업체 직원들에게도 본사 직원과 똑같이 학비, 자녀어학연수비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정 사장은 "세상살이가 힘들어 자살을 결심한 적도 있었지만 꿈을 잃지 않았기에 희망이 다가왔다"며 "젊은이들이 시도도 해보지 않고 너무 쉽게 미래를 포기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며 세상과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을 당부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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