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를 2학년에 중퇴하고 고향인 경북 영덕에서 혼자 공부했다. 그러다 1948년 봄 서울에 올라왔다. 우선 적당한 학교에 편입할 수 있는 지 알아봤다. 마침 서울 혜화동의 동성고에서 보결생을 모집해 1학년으로 응시했다. 합격통지를 받고 곧바로 고향에 연락했다. 등록금 때문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좁쌀과 보리쌀을 팔아 만든 돈을 실로 묶어 보내왔다. 어머니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그래서 중대 결심을 했다. 그 돈을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대입 검정고시를 보자, 그러면 학비를 아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교 3년 과정을 1년 내지 2년에 끝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감은 늘 차고 넘쳤다.
그런 다음 매일 도서관에 다녔다.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엔 국립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은 항상 꽉 찼다. 자리를 얻으려면 문 열기 서너 시간 전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돈암동 성신여고 앞에 살았다. 이른 새벽 돈암동 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4가에서 내린 뒤 소공동까지 걸어갔다. 그 때 국립도서관은 오후 6시면 문을 닫았다. 반면 시립도서관은 밤 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그래서 점심, 저녁 도시락을 2개 싸 가지고 국립도서관이 끝나면 시립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시립도서관은 파고다(탑골)공원 앞과 한국은행 뒷편 등 2개가 있었다.
그땐 검정고시와 관련한 문제집은 커녕 대부분의 과목들이 참고서 조차 없었다. 수학과 물리, 화학 등을 집중 공부했던 나는 ‘이영민에 대해 쓰라’는 식의 문제를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영민은 야구 선수였다. 또 ‘J 벤덤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철학자인지는 정말 몰랐다.
수학도 출제범위 조차 모른 채 무조건 파고 들었다. 편미분과 중적분, 미분방정식 등 고교 범위를 넘는 부분도 죽을 힘을 다해 공부했다. 화학도 일본의 대학교 1학년 생 수준인 이론화학, 무기·유기화학 등과 씨름을 했다. 대입 검정고시에서 요구하는 범위나 수준보다 휠씬 높은 걸 가지고 죽을 고생을 하며 독학을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마치 지도 한 장 없이 무작정 배를 몰고 가는 것과 다름 없었다. 내가 학원 강사 시절 수강생들에게 "너희들은 얼마나 행복한 지 아느냐"고 얘기한 것도 다 이 같은 고생을 겪은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요즘은 검정고시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 웬만큼 공부하면 대개는 붙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시험칠 당시는 전국에서 1년에 3,4명 붙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시험에 붙기만 하면 수재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검정고시는 한 과목만 낙제(40점 미만)해도 떨어졌다. 나는 하루에 4시간 밖에 안 자고 공부했지만 불행히도 첫번째 도전에서 낙방했다. 내 생각에 수학 등 주요 과목은 굉장히 좋은 점수를 받았는데 무슨 과목에선지 낙제를 한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전쟁이 터졌다. 6.25전쟁이 나자 나는 시골 고등학교에서 3학년에 편입, 한학기 정도 다니다 대학시험을 치게 됐다. 나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수석 합격, 52년 3월 입학식에서 물리학과 신입생 선서문을 낭독했다. 아마도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엄청 높은 수준의 수학·물리 문제 등과 씨름 한 덕분인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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