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문호다. 세계 희곡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쏟아낸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0년. 그의 삶과 작품을 기리는 ‘체호프 4대 장막전’이 4월 동국대 예술극장에서 ‘벚꽃동산’을 시작으로 조용히 막을 올렸다. 7월 국립극장 ‘바냐 아저씨’, 10월 정동극장 ‘갈매기’로 이어진 여정은 17일 설치극장 정미소 무대에 오르는 ‘세 자매’를 끝으로 서서히 막을 내리려 한다.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다고나 할까. 대관료가 없어 쩔쩔매며 출발했던 ‘4대 장막전’은 빈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관객들의 지지를 받으며 평단의 적지 않은 갈채를 이끌어냈다.
‘4대 장막전’의 깃발을 들고 올 한해를 달려온 연출가 전훈(39)은 예상 밖 결과에 매우 흡족한 표정이다. "체호프 사후 100주년을 아무도 나서서 기념하려 하지 않아 제가 그동안 입은 은혜와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전훈에게 체호프는 성자와도 같은 인물이다. 그에게 인생을 알게 해주었다. 재물과 출세 등 속된 것들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었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만일 제가 사업가였다면 번 돈을 체호프재단에 기부했을 거예요. 연출가로서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작품을 제대로 무대에 올리는 것이죠. 그분 덕분에 먹고 사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여수정 이호성 김호정 조민기 등 내로라 하는 연기자들의 열정을 노개런티로 쏟아내도록 한 것도 단지 ‘체호프’ 덕분이었다. 바쁜 일정에 쉴 틈도 빠듯한 이들이 짬을 내서 모인 시간은 오후 7시. 모두 지치고 힘들어도 즐겁게 연습했다고 한다. 평일에 만나기 힘들면 일요일에 몰아서 연습에 몰두했다니, 이들의 체호프 사랑은 어떤 개런티로도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전훈은 이번 ‘4대 장막전’ 작품들의 원전을 직접 번역해 대본을 썼다. 문어체의 기존 번역본 대사가 연기자의 입을 통해 나올 때, 생동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문학적 가치는 놓쳤을지 몰라도 연극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번역본엔 등장인물의 명칭이 직위나 애칭에 따라 수시로 바뀌니 관객들은 혼란스럽고, 연기자들은 감정이입에 애로가 있었죠."
결과는 성공적이다. 관객들은 어렵게만 느껴졌던 체호프를 웃으며 즐겼고, 연기자들은 간결한 대사체를 편하게 받아들이며 무대에 올랐다. 매회 공연마다 체호프를 위해 객석 중앙 한 자리를 비워 놓은 전훈은 내년에는 책 출간으로 체호프 사랑을 이어갈 예정이다. "대본, 공연사진, 논문과 평론 등을 엮어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조민기 팬클럽 회원들이 연극 성공을 바라며 올해 초 선물한 노트북 컴퓨터가 작동에 문제가 있을 정도로 그동안 모은 자료가 방대하다.
정동극장 측으로부터 ‘갈매기’를 내년 레퍼토리작으로 맡아달라는 요청도 받아놓은 상태. 그러나 정작 전훈은 32년 뒤 스타니슬라브스키 사후 100주년을 맞아 ‘4대 장막’을 다시 무대에 올리는 것에 더 마음이 쏠려 있는 듯하다. "체호프의 작품을 널리 알린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관점에서 무대를 꾸미고 싶어요. 아마도 그때는 두 자리를 비워 놓아야겠네요. 그리고 50년이 더 지나면 저를 위해 한 자리를 더 비운 ‘4대 장막전’이 있겠죠. 하하하."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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