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5일 파리 동포간담회에서 미국 등이 ‘북한 붕괴론’을 갖고 있는데 이를 접지 않으면 한국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민감한 발언을 했다.‘파리 발언’ 중 파문을 일으킨 내용은 "미국과 일부 서구 국가들에서 북한 체제가 결국 무너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대목. 공식적으로 북한 붕괴론을 채택하지 않고 있는 부시 행정부를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이다.
노 대통령은 나아가 "한국이 가장 강한 발언권을 행사해야 한다" "누구랑 얼굴을 붉혀야 한다면 붉히지 않을 수 없다"는 강한 톤의 언급도 했다. 필요하다면 미국과의 갈등도 감수하겠다는 통첩성 메시지였다.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노 대통령이 ‘일부 국가들’이라고 언급한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일부 논객과 미 정부 내의 강경파들을 뜻하는 것"이라며 "대북 무력 공격 뿐 아니라 경제 제재 등에 의한 북한 붕괴 유도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실언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동포들의 호응 분위기에 끌려서 과잉 언급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적이든 아니든, 파리 발언 전반에 ‘한국의 북핵 주도권 확보, 미국 정부 내의 강경 노선 제동’이라는 노 대통령의 본심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파문이 예상된다. 특히 북한 붕괴를 원하지 않는 중국, 한국의 대칭점에 북한 정권 교체를 원하는 미국 등이 있는 것처럼 구도를 설정한 발언도 예민한 대목이다.
북한이 6자 회담에 계속 소극적 반응을 보이자 노 대통령이 작심하고 미국과 북한을 상대로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파리 발언으로 칠레 한미정상회담에서 구축된 미국과의 협조 구도에 차질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미정상회담 때 노 대통령이 "내 생각은 좀 다르다"며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거듭 설명하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당신 말이 맞다"고 동의했다. 두 정상은 그러나 북한 체제 붕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교환하지 않았다.
파리=김광덕기자 kdkim@hk.co.kr
■ 경제관련 발언
노무현 대통령은 5일 프랑스 동포간담회에서 우리 경제 모델이 미국식으로 편향됐다고 우려를 표명한 뒤 유럽식과 미국식의 조화론을 강조했다. 이 발언은 앞으로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을 성장과 경쟁 중시의 미국식 보다는 분배와 복지 중시의 유럽식으로 꾸준히 바꾸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노 대통령은 "경제 문제에서 미국식과 유럽식 모델을 다르게 느끼고 있다"면서 "나는 한국 경제가 너무 미국식 이론에 강한 영향을 받는데 대해 약간 걱정하는 쪽"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사회복지 담당 장관과 얘기했는데 유럽에서도 미국식의 경쟁우위 정책을 많이 수용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우리는 유럽의 좋은 제도나 사고도 좀 많이 받아들여서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는 외형상 절충론이지만 현 미국식 모델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어 결국 유럽 모델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최근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1가구 3주택 양도세 중과여부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등 정부 여당 내에 성장론과 분배론이 맞부딪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 발언이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측은 "사회복지 확대 및 사회안전망 정비 등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으로 달라진 게 없다"고 설명했으나 재계 인사들은 "해외순방 중 기업 예찬을 많이 하던 것과는 다른 기조의 언급을 해서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파리=김광덕기자
■ 기타 발언들
노무현 대통령은 5일 파리에서 가진 동포간담회에서 ‘프랑스혁명 예찬론’ ‘주류세력 교체론’ ‘규범과 평등의 사회론’ ‘파리의 미학론’을 펼쳤고 6일 소르본대학 강연에서는 ‘EU 동북아 모델론’을 개진했다. 이 논리들을 주제별로 정리한다.
◆ 프랑스혁명 예찬 인류가 발명한 역사 중 가장 훌륭했던 게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이다. 지배와 복종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분으로라도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워 성공한 혁명이 프랑스 혁명이다. 또 하나의 발명이 필요하다. 지금 세계 질서 속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이 있고 힘의 질서가 지배하고 곳곳에서 분쟁이 있다. 이를 해결할 국제적 역량은 부족한데 이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 주류세력 교체론 지금 한국에 누가 주류냐, 옛날에는 주류라고 하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위에 있고 중심에 있고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실력으로 경쟁하는 많은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이 새로운 주류로 등장하고 있다. 변화를 거역하는 세력은 용납되지 않는다.
◆ 규범과 평등의 사회론 대한민국도 이제 힘의 지배, 무리한 비논리의 지배가 아니라 법과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로 간다. 규범이 지배하는, 평등하게 지배하는 시대로 간다. 내 임기를 마칠 때쯤에는 내가 누군지 알아달라며 은근히 자기 지위를 내보이고 싶어하는 촌스러운 일들은 거의 없어질 것이다.
◆ 파리의 미학론 유교 사상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사회에서는 내면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품위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 물질적 풍요, 조형미를 통한 아름다움을 높이 치지 않았는데 유럽은 조형미, 음악 등이 화려하다. 파리가 첫 걸음인데 우리도 좀 품위 있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 EU 동북아 모델론 평화를 통한 공존, 화해 협력을 통한 번영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 가능성을 EU에서 찾으려 한다. 동북아에 EU와 같은 개방적 지역통합체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한국이 동북아의 갈등과 불신을 풀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파리=김광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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