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탕의 ‘배용준 현상’이 새삼 일본여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욘사마’의 도쿄 방문 때, 수만 명의 여성이 수려하고 선량해 보이는 이웃나라의 젊은 탤런트에게 열광했다. 우리 식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아니었다. 불혹(不惑)을 전후 해서도 중년 아줌마들은 뜨거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다정다감한 몸짓들을 보며, 한국 예술가들과 결혼했던 일본여성을 떠올린다. ‘잉여인간’의 작가 손창섭,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 화가 이중섭, 조각가 권진규 등의 부인이다.■ 한국남성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고, 일본여성은 한국예술가를 보는 안목이 탁월한 모양이다. 손창섭 백남준과 일본여인의 결합은 행복해 보인다. 손창섭은 일본으로 귀화했고, 백남준은 부인과 뉴욕에서 살고 있다. 다른 두 사람의 결혼은 비극으로 끝났다. 해방 후의 격동기가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은 것이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부인 마사코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다가 비참하게 객사했다. 권진규는 미술학교 후배인 부인 도모코를 일본에 두고 귀국했다. 귀국 후 새 삶에 실패한 그는 1973년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세 사람의 미술인 가운데, 이중섭 미술관은 서귀포에 세워졌고, 백남준 미술관은 경기 용인에 건설되고 있다. 권진규는 귀국 후 치열한 작업으로 국내 조각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귀국 후 연 그의 전시회들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반면 그 뒤 도쿄에서 가진 개인전은 성황을 이루었고, 대학교수직까지 제의 받았다. 생전에 좋은 일은 일본에서, 쓰라린 실패는 고국에서 있었던 셈이다.
■ 권진규는 "일본 이과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과 도모코와의 결혼이 생애 최고의 일"이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가 타계한 뒤 미술계의 평가가 달라졌고, 회고전들도 크게 성공했다. 지난해 ‘권진규 30주기전’을 연 이호재 가나아트 대표의 주선으로 그의 미술관도 세워지게 됐다. 박문덕 하이트맥주 회장이 건립에 나섰다. 그의 작품들을 애장해 온 컬렉터라고 한다. 시대를 앞장서 가는 예술가의 삶은 고독하고 험난하다. 이중섭에 이어 권진규의 고혼(孤魂)과 작품이 뒤늦게 안식처를 갖게 되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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